[Opinion] 덕수궁 계단에서 [기타]

서울이라는 도시, 나의 퀘렌시아였던 덕수궁 계단에서
글 입력 2018.11.10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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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곳에서 나의 글을 쓴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글을.


어디든 좋다,

발길 가닿는 곳이라면.


스무 살이 되어

매일같이 가게 된 서울이란 곳에서

내 마음의 퀘렌시아는

덕수궁 계단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나는 종종 계단을 찾아간다. 3년 전, 대학 원서를 다시 쓰겠다고 다짐했을 때, 나는 잘 다니고 있던 학교 대신 가끔씩 덕수궁에 들르기 시작했다. 매일 간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해 가을 나는 덕수궁을 여러 번 찾아갔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서울에서 자라지도 않았다. 아마 나와 비슷한 나이의 이들, 그리고 그냥 많은 사람들이 서울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어도,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그래서인지 내가 본격적으로 서울이라는 곳을 향해오기 전, 나만의 조용한 준비를 했던 곳이 덕수궁 계단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덕수궁 석조전의 계단 위쪽이다. 그곳에 찾아가 앉으면 맞은편 시선에는 분수가 있다. 점점 해가 기울면 조명이 켜진다. 나는 한낮의 그곳을 더욱 좋아하긴 했다.


계단에 앉아 덕수궁 바깥의 풍경까지 바라본다. 당연한 거지만 고궁이라는 전체적인 공간은 실내가 아니니, 안에 있지만 궁 주위의 바깥 풍경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네 시, 네 시 반쯤 특히나 그곳에 자주 앉아있곤 했다. 마음속 작은 위로의 공간, 혹은 작은 위안이 되는 것들을 퀘렌시아라고 했던가. 돌이켜보니 그곳은 내게 퀘렌시아였던 것 같다. 사실 서울이라는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지만, 친척 한 분이 사시는 것 외에 연고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사실 그 작은 듯하면서도 없는 게 없는 도시에서 난 떠돌이였다. 나의 정착지가 없는 그 도시를 나는 자꾸만 가게 되는데, 사실상 내가 머무를 곳은 없는 곳이라고 해야할까. 그리고 뜻밖에도, 마치 오래 와본 곳처럼 깊은 차분함을 느끼며 언제든 사색할 수 있게 된 공간이 덕수궁이었다.




자기소개서를 썼다, 석조전 계단에 앉아


  

그곳에서 대학 자기소개서를 썼다니, 내가 생각해도 고궁에서 자기소개서를 쓰는 건 꽤나 어울리는 일이 아니어서 지금까지도 이야기하는 일이다. 그냥 노트북 하나를 들고 가서 계단에 앉아 나를 소개하는 그 글을 쭉 써 내려갔다. 그리고는 내가 가고 싶던 그 학교의 캠퍼스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지금 보니 참 자유로운 영혼이었구나, 싶다. 내가 가장 나다운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사실 한 문장을 못 써도 괜찮으니 노트북이든, 공책과 펜이든 일단 들고 가서 앉아있다는 것. 그 자체로 좋았던 자유로운 시절의 기억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니 어디든 걸어서 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정처 없긴 했지만 큰 자유를 얻었다. 교복을 입던 그때는 오후 세시쯤부터 다섯 시, 아마 내가 느끼기에 오후의 햇볕이 가장 따스하고 나른했던 그 시간이면 나는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니, 나는 드디어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또 서울로 계속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그 도시에서 마음을 두게 된 곳이, 덕수궁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때처럼 덕수궁을 자주 찾지는 않지만, 종종 간다. 그때처럼 계단에 앉아 좋아하던 고궁과 도시의 건물들이 함께 보이는 그 풍경을 자주 보지는 않는다. 그때는 왜 그렇게 그곳에 앉아 사색이 하고 싶었는지, 이제는 이 도시에서 꽤나 적응해 나만의 공간들이라고 할 곳을 여러 군데 찾아서일까, 이전처럼 깊은 마음과 위안을 그곳에 두고 있지는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그곳은 그저 서울의 고궁이라고만 하기에는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이 도시에 적응하기 전, 나의 마음들을 글로 옮길 수 있도록 해준 공간. 서울에는 가보지 않은 곳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시절 우선 내가 익숙한 곳만 반복적으로 찾았는지 모른다. 낯선 곳들 투성이었지만 그 계단에서만큼은 얼마든지 가만히 앉아 멍을 때리고, 아무 생각이든 하고, 다시 어디를 걸어볼까 생각할 수 있던 나의 작은 자리였다. 그때의 그 계단이 좋았고, 한낮의 풍경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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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곳에서, 나의 글을 쓴다는 것은



요즘은 학교 운동장의 계단이 덕수궁 석조전의 계단과 비슷한 감정을 준다. 아마 내가 어떤 공간에서 조금은 더 적응이 필요할 때, 그냥 잠시 쉬고 싶거나 글을 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을 때 찾는 곳이 계단인 것 같다. 꽤 높은 곳에서, 가만히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학교 운동장의 높은 돌계단의 맨 위에 앉아 공책에 무언가를 쓴다.


좋아하는 곳에서 글을 쓴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하루키였던가, 어느 작가는 그리스 남부에서 책을 썼다고 했다. 나야 덕수궁의 계단, 또 학교 운동장의 돌계단이지만, 더욱더 나만의 글을 쓸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 생긴다면 좋겠다. 내가 편할 수 있는 공간에서, 바라볼 때 역시나 편안한 풍경을 보며 글을 쓴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그 순간들에 나는 외롭거나 외롭지 않거나, 그저 나였던 것 같다. 발길 가닿는 공간에 또 찾아가서는 그냥 혼자 글을 쓰는 것 말이다. 그 조용한 순간이면 나와 마음, 그리고 내 마음과 글자들만이 남는 기분이다.



[남윤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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