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하게 지내고 있다. 취준준생 (취준생을 준비하는 학생)의 삶은 유쾌하지 않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이 생활 자체에 애정을 주고 정을 붙여야할 텐데 아직도 낯을 가리고 있다. 이 일상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1:1 면담이 필요하다. 가라앉는 하루들을 살려내야한다. 그것도 어렵다면 반나절이라도, 1시간이라도, 1분이라도 되살려봐야한다.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1.
어젯밤 도서관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공동 현관문에 붙여진 안내문을 봤다.
안내말씀
입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동두천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 되었습니다.
우리 아파트는 활엽수가 많아 특히나 가을이 되면
붉은빛의 어여쁜 자태를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풍광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낙엽의 양도 많아 청소시 송풍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소음이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만추의 가을을 감상하시면서
조금만 여유로운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관리사무소 소장님의 말솜씨가 참 아름답다. 글을 읽기만 해도 가을이 물씬 풍긴다.
공동 현관문을 열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가서, 신발을 벗고 엄마에게 말하는 순간까지 가을이 따라들어온 것 같았다.
다시 읽어도 읽어도 머릿 속에 붉은빛의 가을이 가득하다.
2.
54세 아빠의 차에 타면 나오는 페기구의 신곡을 들었다.
아빠 페기구도 들어요?
그게 뭐야?
그냥 알고리즘에 따라 듣다가 좋으면 추가해놓으신다고 한다.
그 뒤로 나도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종종 듣는다.
가사나 뮤비를 찾아본 적은 없다.
벌써 나온지 3개월 된 신곡이었구나.
너무 시끄럽지도 않으면서, 은은하게 기분을 업시키기에 딱 좋다.
3.
난 10년 넘게 웹툰을 봐온 애청자이다.
그래서 내가 바쁠 때 가장 경계해야하는 건 웹툰이다.
꽂히는 웹툰이 생기면 정주행을 다 하기 전까지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둘째에게 웹툰이 나에게 그런 짓을 저질러버렸다.
난 또 둘째여서 클릭을 안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봐버렸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났을 때의 그 희열감을 잔뜩 즐겼다.
네이버웹툰에서 캡처해온 사진이다.
썸네일이 조금 무섭고 다가가기 어려워보이지만 오해는 하지 말고 19세 이상이라면 일단 읽어보길 바란다.
고태호 작가의 한국 느와르물이다.
4.
춤은 여전히 가끔 춘다.
요즘 지금이 춤이나 추고 있을 때인가 하는 생각에 좀 괴롭기도 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가끔 춤이라도 춰서 이게 날 살린다.
돌아오는 일요일에 하는 퍼포 곡 중 하나이다.
샤데이는 정말 좋다.
퍼포를 준비할 때마다 나는 가사를 찾아보는 습관이 있는데
So if you want it to get stronger, you'd better not let go
You gotta hold on longer if you want your love to grow
Gotta stick together, hand in glove
Hold tight, don't fight, hang on to your love
특별한 가사는 아니지만 Hang on to your love라는 어감이 참 좋다
정말 꽉 잡아야만 할 것 같은 느낌. 벼랑 끝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아야 할 것 같은 느낌.
5.
문화예술이 별건가 싶다. 꼭 시간을 내서 영화 한 편을 다 봐야지만, 서울에 나가 근사한 전시를 봐야지만 문화생활을 한건 아니다. 내 문화생활은 이렇다. 일상과 꼭 붙어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분간이 안 되는 것. 지루한 일상에 간간히 껴있는 치즈 큐브같은 것 (베스킨라빈스 뉴욕치즈케이크)
아무래도 이곳 독일에서 배워온 스킬을 꺼내들때가 온 것 같다.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까먹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건져올리다보면 어떤 일상도 전부 다 사랑해줄 수 있는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