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채식주의자를 읽고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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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독일에서 듣는 소식이라 그런지. 마음이 복잡미묘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 문학상이라니. 아시아 여성 최초 수상자라니. 벅참도 잠시. 아끼고 미루던 <채식주의자>를 황급히 다운로드 받았다. 우리 집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을 익숙한 표지 대신에, 개정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뿜는 표지가 나를 반겼다.
8년 전, 맨부커 상을 받아 큰 화제가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당연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으나,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아빠는 조금 더 커서 이 책을 읽기를 강하게 권하였고, 그렇게 누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책장을 그대로 덮었던 기억이 있다. 단 한 번도 아빠는 내가 읽는 책에 관여한 적이 없었기에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나에게 그 책을 읽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수상 소식을 들은 직후, 하루 만에 전부 읽어내렸고.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채식주의자’라는 제목만에서는 도저히 예상할 수도, 느껴지지도 않는 것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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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 영혜는. 하루아침에 냉장고를 몽땅 비운다. 돼지고기, 바닷장어부터 계란과 우유까지. 사람들은 영혜를 ‘채식주의자’라고 부르지만, 그 단어는 영혜를 담아내기에 턱 없이 부족하다. 단순히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치에 걸려서 도통 내려가질 않는 생명의 덩어리들 때문에. 그리고 젖가슴의 비폭력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영혜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속옷은커녕 상체를 탈의하고 식물들이 광합성을 하듯 햇볕을 쬔다. 자신의 몸에서 유일하게 그 어느 것도 해칠 수 없는 둥근 젖가슴. 젖가슴이 있기에 스스로 아직은 괜찮다고 다독인다. 그리고 영혜는 말한다. 남편에게서 참을 수 없는 고기 냄새가.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풍겨온다고.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영혜가 무엇으로 벗어나고자 하는지. 영혜에게 ‘고기’는 인간이고, ‘육식’은 폭력의 상징이자, ‘채식’은 곧 탈인간의 시도인 것이다.
어렵지 않다. 영혜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보인다. 술을 먹고 겁탈하는 남편,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고 뺨을 때린 아빠, 그리고 이 상황을 방관하고만 있는 엄마와 언니. 끔찍하다. 그리고 이것이 오직 ‘영혜’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비극 따위가 아님을 알기에 더욱 잔인하다. 한국에 존재할 수많은 영혜들. 남편과 가족들은 평범하고 수수한 아내 영혜가 ‘갑자기’ 변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피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에 뛰어갔던 형부는. 끈적한 피가 잔뜩 묻은 와이셔츠를 손에 들고 택시를 탄다. 그러고는 강한 감정의 요동을 느낀다.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 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 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어졌다. 그는 더 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처제의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푹푹 찌는 여름 오후의 택시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위협했고, 구역질나게 했고, 숨을 쉴 수 없게 했다.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이 작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는 그때 했다. 단 한 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십여년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조용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하는 형부를 보면서. 나는 감히 영혜를 짐작한다. 영혜는 육식에, 그러니까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왔고. 그것들을 견딜 수 있을 때 충분히 미워하지 않았기에.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뒤엉켜. 손 쓸 수조차 없게, 견딜 수 없게 들이닥친 것이다. 그렇게 영혜는 무의식의 상징인 꿈에서 가장 먼저 침잠 당하기 시작하여. 더 이상의 육식(폭력)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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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혜의 몽고반점을 전해 듣고. 형부는 강한 매력을 느낀다.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욕망으로부터 발현된 것이기도 하였으나, 사적이고 은밀한 성적 욕망과 뒤섞여 명확히 분간하기 어렵다. 많은 독자들은 형부가 처제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는 것. 그 사실에 역겨움을 참지 못할 테이고, (의도된) ‘불편함과 폭력성’을 포착하겠으나. 나는 다소 다르게 읽는다.
형부가 ‘처제’가 아닌, ‘몽고반점’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아. 나는 감히, 어쩌면 형부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영혜와 가장 유사한 예민도를 지니고 있기에. 영혜가 탈인간화하여, 식물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 그 깊은 사정까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영혜에게서 느껴지는 식물적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힘 있는 덧없음. 사실상 인간이라고 칭할 수 없는 무욕(無慾)의 상태에 다다른, 그러나 여전히 성욕을 자극할 수 있는 젊은 여자 형태를 지닌 영혜의 몸. 그 사이의 모순을. 형부는 알아본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영혜를 정말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처음 느껴보는 이 기이한 아름다움을. 도통 어디에 어떻게 분류해서 인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형부는. 그저 성(性)적 욕망으로 이해하고, 납득하고, 분출해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가 그토록 원했던 꽃들간의 교합 장면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것이 그 때문이 아닐까. 추악한 아름다움. 인간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욕망이 배제되지 않은 손길이 있었기에.
몽고반점을 떠올려보자면. 시퍼렇다. 어쩌면 사람의 몸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식물적인 요소. 그 시퍼런 반점에서 시작된 줄기는 커다란 꽃을 이룬다. 영혜는 자신에 몸에 그려진 꽃이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지워지면 다시 그려줄 수 있냐고, 꽃을 그리고 잠에 들면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혜는 어쩌면 형부보다 더 교합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정말로 식물이 된 것 같다고, 혹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교합 이후, 이제 꿈을 꾸지 않게 될까?- 하고 중얼거리는, 햇빛을 향해 가랑이를 벌리고 젖가슴을 내미는 영혜를 보며 형부는.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꽃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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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영혜는 계속 꿈을 꿨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여전히 인간이기 때문이다. 몸에 그럴듯한 꽃을 그려 넣고, 아무리 서로의 풀냄새를 공유해도. 영혜의 젖가슴은 점점 마르고 뾰족해지고, 영혜의 뱃속에 있는 얼굴들은 여전하다.
인혜는 영혜와 같은 집에서 자랐다. 그게 그들이 겪은 가정적 환경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혜는 성실한 맏딸 역할을 해냈고, 아빠는 그런 장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화살은 모두 영혜에게 돌아갔다. 인혜는 자신이 영혜를 구할 수 있었던 그러나 그러지 못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강제로 미음을 주입하는 의료진들을 밀치고 영혜를 껴안은 것은. 그런 순간들이 인혜를 떠밀었기 때문이겠다.
형부가 그러했고, 영혜가 그랬을 것처럼. 인혜도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삶이 나를 소외시키고 있다는 강한 확신에 휩싸인다. 모빌의 끈을 풀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새벽에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뒷산으로 향한다.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나무였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테다. 온 힘을 다해 산엄하게 버티고 서있을테다. 지우가 없었더라면, 지우만 아니였다면 진작에 끈을 놓아버렸음이 분명한 인혜는. 이송하는 구급차 안에서 영혜에게 속삭인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꿈일지도 모른다-고. 영혜를 구원할 수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음을 깨달은 인혜는. 그저 같이 꿈을 꾸기로 한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모든 나무는 형제같다고 말하는. 시도 때도 없이 물구나무를 서는 영혜는 나무가 될 수 없다. 억울하다. 쏘아보며 항의하지만. 인혜의 눈은 밤마다 방관의 폭력을 자책하며 피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제아무리 수없이 고통받고 폭행당하며 살았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고, 인류이고, 본능에 존재하는 욕망과 폭력성이 나무들을 위협한다. 그리고 나무들은 살아있는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인간을 바라본다.
한강 작가의 필체는 강렬하다. 마치 머릿속에서 영화가 재생되는 듯, 텍스트가 이미지화되어 머리에 내리꽂힌다. 연작 소설, 꼭 3개의 연작 소설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 유기성과 구성도 탁월하다. 가족 구성원이라는 친밀한, 그러나 친밀하지 않은 (uncanny) 형태에서 신비롭게 발현되는 폭력의 씨앗은. 남과 여, 식(食)과 성(性), 미(美)와 추(醜), 나와 내가 아닌 것, 삶과 죽음, 욕망과 평화, 그리고 모든 종류의 폭력. 을 담아내기에 충분하다. 절제된 그러나 충분한 문장의 표현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혜에게 위로를 건네며. 땅 위에 (혹은 아래에) 서 있는 온갖 나무들도 조금은 동요했을지 모르겠다. 이토록 강렬한, 끔찍한, 슬픈, 그러나 아름다운 작품을 읽을 수 있음에 놀랍다.
[한정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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