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미술/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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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다녀왔다. 같은 독일인데도 편도 8시간이라니, 새삼 한국이 얼마나 작은 나라인가를 실감한다. 큰 도시에 대한 환상이나 로망 따위 없는 편이지만, 베를린은 달랐다. 베를린으로 떠나기 며칠 전부터 괜히 히틀러와 나치 그리고 유대인 관련된 유튜브를 틀어놓곤 했다. 역사 심지어 세계사와는 더욱 친하지 않은 나지만. 분단국가 그리고 이방인으로 타국에 살고 있어서일까. 동독 서독 통일 그리고 유대인 학살 관련 내용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오전 10시 반 유대인 박물관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한 나는. 신호등 앞에서 둘 중 어느 건물이 유대인 박물관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청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어딘가 친숙한 바로크 양식 건물, 그리고 이곳저곳 그어져 있는 은색 금속 패널의 이질적인 건물.
“The official name of the project is ‘Jewish Museum’ but I have named it ‘Between the Lines’ because for me it is about two lines of thinking, organization, and relationship.”
- Daniel Libeskind
그 중에서도 1989년 베를린시에서 주최한 "Extension of the Berlin Museum with a Jewish Museum Department" 세계 공모전 속에서 탄생한 리벤스킨트의 건물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인 리벤스킨트는 "Between the Lines"을 내세워 트라우마를 형상화한다. 2개의 선과 3개의 축 (Axis)로 이루어진, 건물의 도면은 어딘가 모르게 유대인의 표식 '다윗의 별'을 떠올리게 한다.
Libenskind Building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Old Building의 지하통로만이 유일한 출입구이다. 현재로 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꼭 지나쳐야하는, 단순히 지나치기보다는 깊숙히 지하로 들어가야만 하는 구조 또한 섬세하다. 외부에서는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그 내부의 진행 또한 그렇다. 현재와 과거의 모호한 경계, 그 이유는 현대와 과거의 연속성 그리고 닮음을 강조하기 위함이겠지.
Underground Floor는 총 3개의 Axis로 이루어져 있다. Axis of the Holocaust를 따라 걷다 보면 무거운 철문이 보인다. 문을 열자 느껴지는 강한 한기와 무섭도록 차분한 공기, Holocaust Tower이다. 24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인 나는. 텅 빈 침묵을 목격한다. 틈새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은 감히 희망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버거워 보인다. 그럼에도 자꾸만 올려다보고 쳐다보게 되는 것은 정말 그것 뿐이기 때문이겠지. 이렇게 차갑고 텅 빈 침묵이라니. 주변을 둘러봐도 그 어떤 생명력을 느낄 수 없고 그저 참혹하게 침묵하고 있다.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주는 싸늘함 그리고 완벽한 차단은 유대인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대변해 줄 수 있었으리라.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런 짓을. 이렇게나 간단하게 그리고 이렇게나 잠깐만 서있어도 느낄 수 있는 것을.....
Axis of Exile 을 따라 걷다 보면, 12도로 기울어진 땅 그 위에 놓인 49개의 콘크리트 기둥. 그리고 그 위에 심어진 올리브나무. The Garden of Exile에 다다른다. 7x7로 이루어진 공간은, 7을 완전함과 신성함의 숫자로 생각하는 유대교를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세계를 창조한 뒤 7일째 되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여김) 특히, 7과 7이 중첩되는 위치에 예루살렘, 유대인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흙이 채워진 기둥을 세움으로. 극심한 혼란과 고통 속 뿔뿔이 해체되는 상황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유대인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고개가 아프도록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봐도 기둥과 기둥 사이의 정사각형으로 재단된 하늘 그리고 여전히 닿을 수 없는 올리브나무만이 있을 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기울어진 울퉁불퉁한 땅이 낯설다. 당시 그들은 이렇게나 극심한 불안감을 느꼈겠지. 지금껏 발 딛고 살아온 땅이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오히려 나를 위협해 오는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절실히 느꼈을 테다.
Axis of Countinuity를 따라 계단으로 올라가면 The Memory void가 보인다. 코너를 돌자 나타나는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인 세모난 공간. 도면에서 살펴보았던 핵심적인 Void 공간 중 한 곳. 그리고 그 바닥을 채우고 있는 1,000여 개의 울부짓는 얼굴들. Menashe Kadishman의 Fallen Leaves이다. 떨어진 잎사귀 위를 걸어 지나가면 들리는 쇳소리는 마치 비명처럼 들린다. 조금씩 다른 표정, 제각각인 크기, 상이한 녹슨 정도는 너무도 현실적이라 더욱 참혹히 느껴진다. 이 공간을 꽉 채울 정도로 발생하는 청각적 자극, 그러나 곧 사라지고 되찾아오는 숨 막히는 정적은 memory void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So the building has many different levels on which it can be read. It’s a bit like… like a piece of music. You can… you can hear it, you can enjoy it, you don’t have to know much about it. (...) Maybe at some housing in the distance maybe newly built, but you’re looking across a message, you’re looking across a connection that was there, that is there in a kind of invisible history of Berlin or an inaudible history of Berlin.”
- Daniel Libeskind
어릴 적 음악을 공부한 리베스킨트의 건축 언어는 악보와 닮아있다.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는 그의 건축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들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도록 한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건물에 쉴틈 없이 틈을 마련해둠으로 그들만의 시각을 얻고 메시지를 얻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들의 핵심적 고통, 허무함. 그 헛된 공허, 부재를 공간화한 아이디어. 유대인들의 삶과 시간의 흐름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 중 하나인 '선'으로 추상하여 표현하고. 억압받고 왜곡된 그들의 삶, 그 구부러진 선의 중첩에서 탄생한 공간을 void로 마련해 둔 것은. 정말이지 신선하다. 발생한 void의 일부는 전시 공간으로, 일부는 관람객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으로 설계된 것 또한 여전히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그들의 삶이 있으리란 함축을 표현하는 것일테다.
덜어내고 덜어내면서 그가 바라던 것은 채워질 생각과 경험들. 우리는 부지런히 그리고 솔직히 느끼고 고심하며 리벤스킨트의 음악을 함께 완성해나가야한다.
이쯤 되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끝나자 가장 먼저 보였던 비디오 작업물, Gilad Ratman의 Durmmerrsss (2020). 엄숙한 분위기의 유대인 박물관을 가득 채우는. 생각지도 못했던 드럼 소리가 다시금 생각난다. 박자라는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소리는 혼란과 조화, 그리고 생존과 희망의 가능성을 모두 품고 있다. 땅(국가) 속 그리고 땅 위의 두 명의 구도 자체로도 의미심장하다. 유대인 박물관이라... 당시 히틀러와 나치당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학살했고, 구체적으로 어떤 고문을 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정보와 자료를 기대했으나. 완전히 다른 방향의 전시를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것은. 각자만의 개인적인 것들로 채워 넣어 단순히 '그들'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들의 경험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겠다. 단순히 텍스트를 읽고, 자료를 해석하며 그 잔혹성과 심각성을 느끼는 것을 넘어.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경험을 체화하는 것. 개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닐까.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모호히 해야만. 말랑말랑해진 시간의 경계 속에서 자신의 것으로 스며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강연을 떠올린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 그러나, <소년이 온다> 자료 작업을 하며, 그중에서도 박용준의 글(“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을 읽은 순간 두 개의 질문은 뒤집어진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1980년 5월의 광주가 2024년 12월의 한국을 살렸다. 그런것처럼. 1940년의 독일도 수많은 현재를 살리고 있으리라. 2024년의 나도 누군가를 언젠가를 나도 모르게 혹은 모두가 알게 구할 수 있기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타인과 나는 너무도 닮아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경계를 허물고 개인적인 것으로 소화해야한다. 그리고 문학과 예술은 쉬지 않고 역설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닮아있다고!
[한정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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