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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하이퍼 옐로우, 옐로우를 초과한 상태. 뜬금없이 무슨 노란색을 넘으란 말인가. 신발을 벗고 1층 전시실의 <솔라리스>에 발을 딛으면 바로 느낄 수 있다. 코르크, 황토 분말, 테라코타 가루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막,분지,혹은 봉분과 같은 환경. 옐로우는 곧 아시아 인종,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매개하는 황해 지역의 지리적 특징을 이야기한다. 즉 하이퍼 옐로우는 이 익숙하고 근접한 듯 보이는 우리들의 옐로우를 넘은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것 너희들의 것의 경계를 허물고. 국가를 초월한 여러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되는 관념. 우연한 만남을 통해 무관한 것들 사이에 피어나는 공통성을 포착해 보자. 지리적인 공간의 초월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시간성을 허물고 현실의 임계를 넘을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포터블 키퍼, Portable Kee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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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키퍼 (portable keeper)는 그 이름답게 '이동식 지킴이'이다. 버려진 선풍기 날개, 깃털로 만든 막대 오브제를 등에 짊어지고 모래내 시장 인근을 오간 퍼포먼스(포터블 키퍼, 2009)가 그 첫 등장이다. 마치 일종의 의식처럼 보이는 이 퍼포먼스는 재개발 공사 현장, 즉 미래를 짓기 위해 과거를 붕괴시키는 현재를 위한 일종의 애도라고 할 수 있겠다. 사라지는 장소에 대한 기억이자 장소의 목격자 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2전시장에서는 총 네 가지의 포터블 키퍼를 볼 수 있었다. 오미즈토리 의식에 등장하는 거대한 대나무 횃불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프로펠러를 달고 있는 포터블 키퍼, 그리고 동해,서해,황해를 현상화하여 부표를 달고 있는 포터블 키퍼. 임민욱은 중심과 경계가 없는 물의 자유로움을 열망하는 이원의 시, <중심을 지운 것들은 전신이 날개다>를 인용하며 포터블 기퍼를 설명했다고 한다. 단순히 탕후루처럼 생긴 거대한 구슬의 생김새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바다, 물을 표상하기 위해 작은 원의 연속을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3전시실에도 천장에 매달려있는 두 가지의 포터블 키퍼가 있다. <십일면 포터블키퍼>와 <수메루>는 2전시실의 포터블 키퍼와는 다소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강렬한 검은색 그리고 하얀색은 마치 대비를 이루는 것처럼 느껴지며, 바닥으로 길게 늘어지고 허공 한참에 멈춰 존재하는 형상 또한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임민욱에게 있어서 포터블 키퍼는 오브제 혹은 토템과 같은 것이려나. 특정한 장소에 맞추어 포터블 키퍼를 제작하는 걸까. 아니면 포터블 키퍼를 먼저 구상하거나 제작해 둔 다음 장소들을 배정해 주는 것일까.

 

마치 장례식을 치르는 것처럼,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오브제를 통해 장소의 소멸을 애도한다는 개념 자체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임민욱 작가는 '시간에 따른 나의 감각은 일반적인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성이 아닌, 과거-미래-현재의 순차를 따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그의 포터블 키퍼에는. 그 장소의 기억에 대한 애도뿐만 아니라, 미지의 것에 대한 가능성 또한 함께 표상되어 있겠다. 이처럼, <하이퍼 옐로우>에서 임민욱은 '장소'에 대해 남다른 관점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접근의 조각들은 30분가량의 영상물에서 최종적으로 종합된다.

 

 

 

S.O.S 달려라 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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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 올라서니 거대한 거울 오미코시가 가장 먼저 날 반긴다. 거울이 달려있는, 신기한 다리를 가진 이 가마의 정체를 궁금해할 때쯤, S.O.S-달려라 신신의 컨셉 드로잉을 본다. 연기에 휩싸인 신을 모시는 가마를 끄는 사람, 그리고 앞서가는 사람. 검정 배경에 흰 선으로 대충 형태만 잡아놓은 드로잉은 나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뒤이어 <동해사>를 시청한다. 3채널 영상 작업물로, 불의 축제(도다이지 오미즈토리 축제의 '오타이마츠')와 물의 축제(후카가와의 '하치만 마츠리') 그리고 임민욱 작가가 직접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십일면관음 캐릭터가 중앙에 등장한다. 거대한 횃불을 든 채로 사찰 난간을 내달리는 제례는 생각의 바다, 도시, 사찰을 달리는 퍼포먼스와 나란히 제시되어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공통성을 생성하고 소멸시킨다. 도저히 정체를 알기 어려운 나레이션의 내용과 전개는 3전시실 S.O.S 달려라 신신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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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 달려라 신신은 2024년 3월 도쿄 스미다강에서 진행된 퍼포먼스이다. 2009년 3월 한강에서 진행된 S.O.S 채택된 불화, S.O.S 채택된 불일치와 평행 세계를 이룬다. 강을 달리는 두 척의 배가 등장하고. 서로 인사를 나눈 사람들은 강변을 유랑하며 여러 사건을 경험한다. 하이쿠 성인 마츠오 바쇼의 방랑규칙을 전하는 정원사, <나의 최애>(Ma Préférence, 1978)을 부르며 달리는 한국인과 프랑스인 연인, 서식지를 향하여 활강하는 철새들. 배 안에서는 선장의 개인적인 옛날이야기와 김민기의 노래 <친구>(1968)이 울려 퍼진다. 노래가 전환되며 (동해사에서 쓰였던 음악과 동일함) 등장한 <거울 오미코시> (신을 모시는 가마)는 연기에 휩싸여 S.O.S 신호를 보낸다. 신신은 새로움의 신으로, 물이 흔들리고 천년이 무너지고 만년이 반기고 불과 함께 달려오는 신이다. 순간순간의 새로움과 소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 예측할 수없는 온갖 우연과 내러티브의 만남은 익숙함을 낯설게, 낯섦을 익숙하게 만든다.

 

임민욱 작가가 내세운 공시성은 복수의 사건이 이미지의 친족성에 의해 일어나는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가리킨다. 이는 곧 기억이 역사로 수렴하고, 개인이 집단으로 수렴하는 시간의 작용 모두 우연에 수렴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임민욱 작가는 회화와 설치 미술, 영상 작업물, 그리고 퍼포먼스를 통해 시간의 작용에 존재하는 치유와 폭력의 양가성을 똑똑히 포착한다. 그중에서도 물이 흘러 강이 되고 또 바다가 되는 공간에 주목하여 시간의 유랑성을 극대화하여 제시한다. 30분 남짓의 영상 속에서 쏟아지는 다양한 우연과 내러티브는 낯설지만 매우 친숙하다. 특별해 보이다가도 지독히 일상적인 것도 같달까. 이유 모를 울컥함이 올라오기까지 한다.

 

 

여러분 도시도 달리고 있습니다.

도시도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죠.

 

 

달리는 사람들, 달리는 배 그리고 달리는 도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달린다는 말은 도시도 기억이 있고, 기억이 있다는 말은 도시에게도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달린다는 행위는 과거의 현재, 생성과 소멸, 기억과 망각 그리고 익숙함과 낯섦의 스펙트럼 속에서의 왕복이 아닐까. 산과 강, 역사적인 장소들이 사라졌다면 그 장소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지 마라. 그 장소를 더욱 은폐하라. 그것이 새로운 기억이 되게 하라. 그것이 장소의 권리가 되게 하라- 고 이야기하는 방랑규칙과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 그 깊은 바닷 속에 고요히 잠기면 /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다양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노랫말은. 이런 나의 확신에 박차를 가한다. 장소라는 개념을, 어떤 좌표에 고정되어 있다는 관념에서 탈피하여 유랑하는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사람, 도시, 심지어는 황해까지도.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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