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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고전이 된 모험담에는 이유가 있다 - 도서 '오디세이아'

오디세우스가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

by 이승주 에디터
2026.08.1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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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1891년, 캔버스에 유채,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멜버른, 오스트레일리아)

 

 

90년대생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는 낯선 고전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어린 시절 홍은영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아마 비슷할 것이다. 신들은 아름답고 변덕스러웠으며, 인간들은 사랑하고 질투하고 복수했고, 한 사건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사건이 이어진다. 책장을 넘기는 데 ‘고전을 읽는다’는 의식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재밌었다.

 

아우구스테 레히너의 『오디세이아』를 읽으며 오랜만에 그 느낌을 다시 느꼈다. 레히너는 고전의 늘어지는 내용을 적절하게 재배치하여 대사를 살리고 사건의 기승전결을 분명하게 만들면서, 오디세우스와 그 주변 인물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그려낸다. “병사들이여!” 하고 입을 여는 오디세우스의 대사는 반복될수록 하나의 캐릭터가 된다. 원전에서라면 흩어져 있었을 장면들이 레히너의 손을 거치며 인과의 리듬을 얻고, 사건은 빠르게 이어지고 인물들은 자기 성격에 맞게 행동한다. 캐릭터의 성격, 동기, 사건이 딱, 딱, 정확한 각도로 서로 맞물린다.

 

그래서 그냥 『오디세이아』는 재밌는 이야기다.

 

이 단순한 감상 때문에 오히려 다른 질문이 생겼다. 우리는 흔히 『오디세이아』가 ‘고전이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서를 바꾸어 생각해야 한다. 이 이야기가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것은, 애초에 너무 잘 만든 이야기여서가 아닐까?

 

 

 

1. 사건을 만들어내는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매력적이다. 그는 사건에 휘말리는 주인공이 아니다. 자기 성격으로 사건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다.

 

오디세우스는 영리하고 용감하다. 부하들을 아끼며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에서 물러나지도 않는다. 동시에 호기심이 많고 자존심이 세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감정을 좀처럼 눌러두지 못한다. 이 영웅은 치명적인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재밌는 것은 오디세우스를 위험에 빠뜨리는 성질과 그 위험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성질이 같다는 점이다.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이 특징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오디세우스는 굳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인의 거처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호기심은 순식간에 동료들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무모함이 된다. 그러나 막상 위기에 빠지자 그들을 구해내는 것 역시 오디세우스다.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라고 속이고, 폴리페모스를 취하게 만든 뒤 눈을 찌르고, 양의 배 아래 숨어 탈출한다. 여기까지라면 영리한 영웅의 승리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안전하게 빠져나온 뒤 굳이 자신의 진짜 이름을 외친다. 자신을 쓰러뜨린 자가 누구였는지 폴리페모스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듯이, 돌이 한번 배를 부술 뻔했는데도 굳이 외친다. 결국 그 한마디 때문에 폴리페모스는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청하고,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훨씬 길어진다.

 

캐릭터 설계가 빈틈없다. 영리해서 살아남고, 자존심 때문에 다시 위험해진다. 용감해서 미지의 장소에 들어가고, 바로 그 용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고에 휘말린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에게서 호기심만 제거하면 더 현명한 인간이 될지는 몰라도 훨씬 재미없는 주인공이 된다.

 

주변 인물들은 이 성격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오디세우스를 믿고 따르는 병사가 있는가 하면, 친척 에우릴로코스는 급기야 그의 결정을 따라가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고 반발한다. 독자에게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즐겁지만, 그를 따라다녀야 하는 부하에게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이 충돌 덕분에 오디세우스는 단순히 ‘완벽한 영웅’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를 비열한 인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필요하다면 속임수를 쓰지만 자기 사람을 버리지는 않고, 위험 앞에서 가장 먼저 몸을 피하는 사람도 아니다. 오디세우스의 영웅다움은 흠 없는 고결함보다도, 위험을 감당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보다 훨씬 현대적인 주인공처럼 보인다. 반듯하게 빛나는 사람이라기보다, 성격 하나 때문에 끊임없이 일을 벌이고 또 기어코 수습하는 사람이다. 오디세우스의 영웅성은 압도적인 힘이나 결점 없는 고결함보다, 자기 성격 때문에 발생한 위기까지 끝내 해결해내는 능력에서 나온다.

 

 

 

2. 귀환의 의미를 만드는 인물들


 

『오디세이아』를 읽다 보면 등장인물이 놀라울 만큼 많다. 괴물과 마녀와 왕과 병사와 예언자와 죽은 자들까지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많은 인물들이 무작정 늘어선 것은 아니다. 상당수는 오디세우스라는 인물과 그의 귀환을 다른 각도에서 비추는 역할을 한다.

 

가장 분명한 인물은 페넬로페다. 그녀는 단순히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아니다. 수의를 짰다가 밤마다 다시 풀어 구혼자들을 속이고 시간을 번다. 오디세우스가 바깥세상에서 지혜로 살아남았다면, 페넬로페는 한 자리에서 지혜로 버틴 사람이다. 두 사람의 재회가 곧바로 감격적인 포옹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를 시험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도 그래서 자연스럽다. 이 부부에게 지혜는 사랑의 조건이기도 하다.

 

반대로 아가멤논의 귀환은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비추는 어두운 거울이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다고 해서 반드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가멤논의 비극이 먼저 제시되기 때문에, 페넬로페가 오디세우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부부애를 넘어 진정한 귀환으로 느껴진다.

 

저승에서 만나는 어머니 역시 중요하다. 그 장면에서 이타카는 지도 위의 어떤 지점이나 단순히 멈춰서 있는 고향이 아니게 된다. 오디세우스가 떠돌고 있는 동안 고향의 시간도 흐르고 있으며, 그가 돌아가지 못할수록 잃어버리는 것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귀환에는 비로소 시간적 긴장이 생긴다.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이야기 역시 이 귀환이라는 사건에 무게를 싣는다. 이 둘의 관계에는 신화적 상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인간성이 있다.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된 아내와 그 아내를 되찾아온 남편이 같은 자리에 앉아 과거를 이야기할 때, 그들의 대화 속에는 오래 묵은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다. 거대한 전쟁과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했던 삶이 이 순간을 통해 다시 한 번 개인의 무게로 내려앉는다. 오디세우스에게도 귀환은 승리의 완성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짊어져야 할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이 부부는 미리 보여준다.

 

예언자와 신탁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단순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장치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면서 독자에게 하나의 약속을 건넨다. 언젠가 이 예언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곳에 도달할 것인가’가 된다. 귀환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귀환을 향한 여정을 더 팽팽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오디세이아』의 조연들은 각자의 에피소드에만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는 오디세우스의 무모함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그의 사랑을 증명하며, 누군가는 귀환의 실패 가능성을 보여주고, 누군가는 돌아갈 이유를 환기한다. 수많은 인물이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변주하는 셈이다. 『오디세이아』의 재미는 그래서 치밀한 서사구조 구축의 결과다.

 

 

 

3. 바다조차 등장인물이 되는 세계


 

여기에 그리스 신화 특유의 세계관이 더해지면 이야기의 구조가 더욱 흥미로워진다.

 

『오디세이아』의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그저 일어나지 않는다. 바다가 거칠어지는 데에는 포세이돈의 분노가 있고, 기막힌 지혜를 얻는 순간에는 아테네의 손길이 있으며, 인간의 사랑과 욕망에도 신의 의지가 개입한다. 현대인이라면 자연현상이나 우연, 심리적 변화라고 설명할 일들이 이 세계에서는 모두 신의 인간적인 행동이 된다.

 

그래서 바다가 단순한 배경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오디세우스에게 화가 난 포세이돈이다. 지혜 역시 주인공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추상적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찾아와 조언을 건네는 아테네가 된다. 세계의 거의 모든 요소가 사건에 참여한다.

 

흥미로운 것은 신들이 그렇게 장엄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은 질투하고 토라지고 편애하고 복수한다. 인간보다 훨씬 강대한 존재이면서도 감정의 크기는 놀랄 만큼 인간적이다. 그래서 때로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들의 감정을 세계 전체에 투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신들이 “인간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신들의 탓을 한다”는 식으로 불평하는 장면은 그래서 묘하게 메타적으로 읽힌다. 정말로 그리스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를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설명할 수 없는 소원과 사랑과 불운에 얼굴과 성격을 부여하면서 말이다.

 

그 순간 세계는 더 이상 무작위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누군가의 의지가 생기고, 모든 현상은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태양이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헬리오스의 마차가 되고, 바다가 자연현상이 아니라 포세이돈의 감정이 되는 순간, 세계 전체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4. 떠돌아야 재미있지만, 결국 돌아와야 한다


 

개인적으로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역시 오디세우스의 방랑이었다. 키클롭스를 만나고, 키르케의 섬에 들어가고, 저승으로 내려가고, 괴물을 피해 항해하는 동안에는 거의 매번 낯선 세계가 열린다. 오디세우스는 그곳에 들어가 사고를 치고, 위험에 빠지고, 다시 머리를 굴려 빠져나온다. 그가 가진 모든 장점과 결함이 가장 활발하게 작동하는 구간이다.

 

그래서 칼립소의 섬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부분이나 텔레마코스의 여행 이후 상대적으로 정치극에 가까워지는 후반부는 방랑 에피소드보다 덜 흥미롭게 느껴졌다. 특히 이타카의 구혼자들은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처럼 미묘한 관계를 만들어내기보다 비교적 단순한 적대자로 그려진다. 평면적인 캐릭터 묘사는 위대한 모험으로 가득 찬 초반에 비하면 힘이 빠진다.

 

그럼에도 그 지루함마저 이 이야기에는 필요했던 것 같다.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그 더딘 구간조차 견딜 만한 것이 된다. 오디세우스가 영원히 떠돌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지는 않다. 모험은 끝나야 한다.

 

이타카라는 목적지가 처음부터 존재하기 때문에 키클롭스도, 키르케도, 포세이돈도 하나의 이야기 안에 묶인다. 만약 오디세우스가 아무 목적 없이 섬에서 섬으로 떠돌기만 했다면 『오디세이아』는 매력적인 에피소드 모음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모든 방해는 ‘귀환을 가로막는 것’이 되고, 모든 탈출은 이타카를 향한 한 걸음이 된다.

 

흥미롭게도 오디세우스는 처음부터 여행을 원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행동할 만큼 집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수많은 전설을 남기는 모험가가 된다.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과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기질이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 모순이야말로 오디세우스를 오디세우스로 만든다.

 

그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인간도 아니다. 신탁이 결국 이루어지는 세계에서 살면서도,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신과 자연에 맞선다. 운명은 정해져 있을지 몰라도 저절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포세이돈이 바다를 뒤엎어도 배를 띄워야 하고, 괴물이 길을 막아도 방법을 찾아야 하며,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다시 싸워야 한다.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은 떠돌 때 가장 빛난다. 그러나 『오디세이아』라는 이야기는 그가 돌아왔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타카가 있기 때문에 그의 방랑은 단순한 에피소드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의 모험이 된다.

 

 

 

5. 고전을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


 

아우구스테 레히너의 『오디세이아』가 특히 반가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레히너의 장점은 고전을 ‘쉽게 설명한다’는 데만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이야기가 본래 얼마나 재미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다시 전면에 꺼내놓는다. 앞서 살펴본 오디세우스의 모순된 성격, 귀환을 비추는 조연들의 배치, 세계 전체가 사건에 참여하는 방식, 그리고 끝내 닫히는 여정의 구조—레히너는 이 모든 것을 덜어내지 않으면서도 늘어지지 않게 배치한다. 대사는 생생하고, 캐릭터는 선명하며, 사건의 연결은 빠르다. 그래서 독자는 고전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책장을 넘기는 대신,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 책장을 넘긴다.


나는 반드시 원전을 먼저 읽어야 고전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이야기와 처음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이 왜 수많은 사람에게 계속 이야기되어 왔는지를 먼저 경험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레히너의 『오디세이아』와 어린 시절 읽었던 홍은영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의외로 같은 일을 한다.

 

오래된 이야기를 박제하지 않고 다시 이야기한다. 좋은 각색은 원전의 정보를 빠짐없이 옮기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독자에게 들려주는 일에 더 가깝다.

 

『오디세이아』를 읽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이 작품이 서양 문학의 기원이다’ 같은 위엄이 아니었다. 오히려 호메로스가 굉장히 능숙한 이야기꾼이었다는 새삼스러운 감탄이었다. 사건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주인공을 세우고, 그의 성격을 끊임없이 비추는 조연을 배치하고, 세계의 모든 자연현상마저 서사 안으로 끌어들인 뒤, 처음부터 약속했던 귀환으로 끝내 이야기를 닫는다.

 

어쩌면 『오디세이아』가 재미있는 것은 고전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계속 다시 이야기했고, 그렇게 고전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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