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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짧은 순간, 오래가는 여운 – 걸스온탑(2017) [영화]

순간마다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by 백승원 에디터
2026.07.30 15:49

며칠 전 영화관에서 나홍진 감독의 '호프(HOPE)'를 보고 왔다.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평이 자자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호'였다. 다만 영화 자체보다 영화관에 가기까지의 과정에 되레 진이 빠졌다. 예매하기까지 꽤 먼 길을 돌아갔기 때문이다. 예매했다가 취소했다가 시간을 바꾸기를 반복했다. 남들도 영화 한 편 보기로 마음먹는 데 이만큼 에너지를 쓰는지 모르겠다. 영화 보기보다 영화를 보겠다고 마음먹기가 더 힘들다니, 참으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인생이다. 긴 호흡의 영화를 보려면 마음을 먹어야하는 병이 있는 사람이라, 새로 나온 영화든 예전에 봤던 영화든 인생 영화든 결국은 모두 '시간'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 시간에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생산적으로 쓰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을 되뇌며 영화 한 편에 나름 시간을 투자해보려 하지만, 역시 잘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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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겁쟁이에게 그나마 만만한 것은 단편 영화다. 영화의 길이가 깊이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짧은 순간에도 오랜 여운을 남기는 영화가 있다. 내게는 이옥섭·구교환 감독의 <걸스온탑>(2017)이 그렇다. 천우희와 이주영이 출연한 5분 분량의 단편으로, 제19회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선인장과 이별한 우희가 주영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내용의 전부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유닛 '2X9'(2옥섭, 9교환)의 작품 중 좋아하는 것을 꼽자면 입이 닳도록 많지만, 이 영화에는 나름의 기억, 분명 힘들었지만 미화되어 이제는 '추억'이라 부를 만한 시간이 담겨 있다.




사랑과 반려


 

대학에 올라와 시네필이라 불리던(아마 본인들은 이 별명이 유난스럽다며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동기들 틈에 섞여 이옥섭, 구교환 감독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때까지 영화라고는 가족들과 영화관에서 보는 게 전부였는데, 유튜브에서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제법 충격이었다. 영상과 영화의 'ㅇ' 정도를 겨우 알아가던 중이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의 영화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왜 동기들이 입을 모아 이옥섭과 구교환의 이름을 불렀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영상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에 심취해 동기들과 뭉쳐 영상 스터디를 꾸렸다. 자연스레 <걸스온탑>을 오마주하게 되었고, 선인장을 들고 북촌과 용산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

 

좋은 데 가는거야.

 

우희는 작고 소중한 선인장 하나를 반려식물로 들였다. 다육이 정도가 아니라 멕시코에서나 볼 법한 사람 만한 선인장이라는 사실은 모른 채로 말이다. 처음 이 작품으로 오마주 영화를 기획할 때, 우리는 사랑과 반려동물을 자주 언급했다. 실제로 영화에서 우희가 선인장을 집에 들이고 쓰다듬는 장면에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온다.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반려동물을 키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넌지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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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이 포옹이 필요하대? 그냥 곁에만 있어주면 되는 거 아냐?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어떻게 다를까를 나름 심도 있게 고민했다. 우리가 내린 답은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지금 보면 허술한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 시절 고작 다섯 명이 배우와 스태프를 번갈아 가며 찍은 영화치고는 제법 봐줄 만하다.

 

이 영화를 다시 찾을 때면 반드시 그때 만들었던 영화까지 한 세트로 보게 된다. 민망하지만, 중독스러운 꼬순내처럼 끊을 수 없는 정겨움이다.

 

 

 

지붕뚫고 하이킥


 

겁쟁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부끄럽지만, 괜히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간다. 오늘 다시 이 영화를 펼쳐 보면 꿈을 생각하게 된다. 발 딛고 선 현실이 품지 못한 꿈 말이다. 그건 어릴 적 대통령이 되겠다던, 그 시절 어린이라면 누구나 품었을 법한 흔하고 담대한 꿈일 수도 있고, 예술가가 되겠다며 손닿는 기회마다 모든 걸 갈아 넣었던 지겨운 낭만의 꿈일 수도 있다.

 

가시 때문에 내가 안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희도 겨우 발 딛고 살 6평 원룸, 선인장의 머리 끝이 천장에 닿는다. 눕힐 수도 없고,지붕을 뚫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현실’이 코앞이다. 정말 원하지만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앞에 두면 사람은 변명을 찾기 마련이다. 실력이 부족했다, 기회가 없었다, 몇 가지 이유를 찾다 보면 정말로 그것을 원하는지에 대한 감각은 흐려진다. 그래서 괜찮아진다. 그것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더 이상 갖고 싶은 것을 두고 마냥 투정 부릴 수 없는 어른의 자기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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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을 찾으러 가자는 주영의 말에 우희는 외발자전거를 탄 주영의 어깨에 몸을 맡긴다. 위태위태한 발놀림에는 묘하게 생기가 넘친다. 5분 남짓한 러닝타임이기에 보고 싶은 만틈 이 장면을 돌려볼 수 있다. 이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돌려 보아 대사까지 외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할 이야기가 넘쳐난다.

 

분명한 건 오늘은 이 영화를 보며 사랑보다 꿈을 떠올렸다. 다만 왜 지금 이 영화가 생각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학 시절이 그리워진 걸까, 친구들이 보고 싶어진 걸까. 어쩌면 그냥 영화가 보고 싶었나 보다. 내일은 커녕 오늘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몰라 시간을 아껴 쓰고 싶지만, 돈보다 아껴 쓰기 어려운 게 시간이라는 것을 새삼 체감하곤 한다. 이 순간에도 야속하게 시간은 흐르고 있다. 그러면 겁쟁이는 부담 없이 여러 번 돌려보고, 여전히 여운을 주는 이 영화를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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