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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귀하의 무사 생환을 기원합니다 - 한국사 이상현상 연구원 [도서]

자료에 포함된 규칙을 어길 시, 귀하는 즉시 순직 처리됩니다.

by 윤선주 에디터
2026.08.3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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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과 고분, 사찰 등지에서 사람들이 실종된다. 사적지에서 이상 현상이 반복되자, 국가는 ‘한국사 이상현상 연구원’을 설립해 실종자들을 구한다.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곳에 가기 위해서는 정해진 ‘탐사 지침’을 따라야 한다. 우선 핸드폰 등 현대 문물을 반납하고 한복을 입는다. 이상현상 발생지에서 눈을 감고 정해진 행동을 한 다음, 한기가 느껴지면 눈을 뜬다. 그러면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듯, 조선과 고려, 백제의 옷을 입 사람들이 있는 시공간으로 이동한다.

     

    역사적 인물을 마주치더라도 놀라선 안 된다. 부자연스러운 행동은 생환 가능성을 떨어트릴 수 있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평범한 궁인인 듯 행동해야 한다. 흉측한 얼굴을 한 인물을 만나도, 기이한 일들이 벌어져도 침착해야 한다. 탐사 지침에 적혀있는 ‘실종자 구출법'과 ‘탈출 방법’을 따르지 않으면 탐사원은 순직 처리될 수 있다.

     

    최인서 작가의 소설 <한국사 이상현상 연구원>은 실종된 사람들을 구하고 이상현상의 배후를 추적하기 위해 연구원에서 작성한 탐사 지침서, 사건 보고서, 음성 녹취록, 면담 기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탐사 지침서 귀퉁이에는 탐사원들이 쓴 메모가 남아있다.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연구원의 신입 탐사원이 된 듯 몰입하게 된다.

       

     

    이상현상 탐사 지침


    1. 원영궁 내에서 지나치게 오래 머물 시 귀하는 환각, 환청, 폐소공포증, 극도의 허기 갈증, 피부 변색, 토혈, 그 밖의 유독 증세를 겪을 수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탐사를 마치길 권고드립니다.

     

    2. 원영궁 진입 후 일반적인 궁인인 척 행동하십시오. 만약 폐허가 된 전각 또는 곁을 스치는 그것들에 지나친 주의를 기울이거나, 놀라거나, 공포에 질리거나, 큰 소리를 내거나, 어떤 식으로든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면 귀하의 생환 가능성은 급락합니다. 원영궁 내 존재들은 법도에 어긋나게 구는 궁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3. 원영궁 내 존재들은 인간의 형체를 띠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이목구비가 뒤죽박죽으로 배치되어 있거나 신체 일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을 주시하지 말고 시선을 내린 채 이동하시길 권고드립니다.

     

    4. 절대 벽화를 주시하지 마십시오. 이를 어길 시 귀하는 순직 처리됩니다.

     

    5. 피비린내와 썩은 향내, 방울 소리에 동요하는 순간 귀하는 순직 처리됩니다.

     

    6. 실종자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을 헤아려 구출에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단, 반드시 탐사원 본인의 안전을 먼저 확보해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무사 생환을 기원합니다.

     

     

    탐사원들에게는 여러 가지 규칙들이 주어진다. 그 규칙을 어기면 이상현상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되고, 규칙을 따르면 살아남는다.

     

    일반적으로 ‘규칙 괴담’은 일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 영화관, 학교 등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공지사항처럼 나열하고, 왜 이 이상한 규칙을 따라야 하는 건지,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 건지 상상하게 해 공포를 유도한다. <한국사 이상현상 연구원>은 그 배경을 역사적인 공간으로 옮겨놓는다. 역사를 아는 만큼, 이상 개체들의 사연도 추측할 수 있다.

     

    소설 속 이상 개체들은 저마다 한을 품고 있다. 어머니가 무수리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린 조선의 왕 ‘영조’, 아버지에게 버려진 ‘사도세자’, 사약을 받아 죽은 ‘장희빈’과 ‘단종’의 모습을 한 기이한 인물들이 궁을 떠돌고, ‘장화와 홍련’이 종갓집을 배회한다. 경신대기근으로 고통받은 마을 사람들은 실종자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한국의 무속신앙에서는 망자의 한을 풀어주고 저승으로 인도하는 천도재를 한다. 그 영향 때문인지 한국 공포영화와 소설은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한을 풀어주고 공포에서 벗어나는 이야기가 많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떨까.

     

    경신대기근으로 몰락한 거렁바위골은 대대로 당산나무를 섬겨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를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뭄과 홍수, 메뚜기떼의 습격까지 받아 배를 곯던 사람들은 입을 줄이기 위해 아이들을 버리고, 심지어 먹기까지 했다. 인구의 10분의 1이 사망할 정도로 끔찍한 재난. 비참하게 죽은 이들이 붙잡은 것은 당산나무가 아닌, 검은 나무였다.

       

     

    “그것은 굶주리고, 절규하고, 피눈물을 흘리다 비명에 간 이들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이 한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지. 다시 삶을 줄겠다고, 가장 애타는 소망을 이뤄주겠다고…

     

    그리하여 망자들은 그것의 가장 충직한 백성이 되었다. 게다가 무언가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는 망자들까지 몰려들었지. 그 모든 망령의 숭배를 받으며 그것은 왕을 참칭할 만큼 강대한 신이 되었다.”

     

     286쪽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데 왜 신은 보고만 있는 걸까. 뭘 그리 잘못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얼마나 간절해야 신이 도울까. 정말 보고 있긴 한 걸까. 왜 신은 응답하지 않는 걸까.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은 자신의 고통을 돌봐주겠다는 새로운 신이 나타나자 이를 숭배한다. 가슴속에 한을 품고서 미련이 남은 공간을 배회하다가, 자신들의 신을 위해 산 자를 제물로 바친다. 산 자인 우리가 어떻게 그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

     

     

    “이 작은 땅이 얼마나 긴 세월을 거쳐왔느냐? 그리고 그 세월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울부짖고 신음하며 한스럽게 떠나간 목숨이 얼마나 되겠느냐? 그런 자들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언제고 양분을 얻어 회생할 수 있다.”

     

    289쪽

     

     

    탐사원들은 간절하게 신을 찾지만 응답받지 못한다. 이들은 좌절하다가도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선다. 선배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탐사 지침서’를 따라서 현장에 뛰어들고, 생존자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건다. 거대한 비극 앞에서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강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많은 이들의 희생 끝에 맞이하게 된 결말을 행복한 결말이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희망을 얻은 결말을 비극이라 할 수도 없다. 거스를 수 없는 재난을 겪어내는 우리가 그렇듯, 이들도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떠나보낸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곁에 있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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