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Opinion] 녹과 뼈 이후의 통증, 그리고 사랑 : 러스트 앤 본 [영화]

러스트 앤 본 Rust & Bone, 자크 오디아르 (2013)

by 정희정 에디터
2026.08.20 18:09

rustand.jpg

 


늘 본능에 충실한 거친 삶을 살아온 삼류 복서 알리. 그는 5살 아들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누나 집을 찾게 되고 클럽 경호원 일도 시작하게 된다. 출근 첫 날, 알리는 싸움에 휘말린 범고래 조련사 스테파니를 돕게 되고 당당하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끌려 연락처를 남긴다. 이후,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스테파니는 깊은 절망의 끝에서 문득 알리를 떠올리게 되는데…

 

Synopsis

 

 

영화 <러스트 앤 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6854_5158da7898fdb_still_02[H500].jpg

 

 

한 여자가 물 위에 서서 손짓 하나로 범고래를 움직인다. 몇 톤짜리 몸이 그녀의 팔을 따라 솟구치고 방향을 튼다. 밤이면 조명 아래서 낯선 시선을 탐닉하고, 불쾌함 앞에서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두르던 삶. 그녀에게 육체는 세상을 가장 뜨겁게 누빌 수 있는 자유의 통로였다.


사회가 그어놓은 테두리 밖에서 오직 본능의 결을 따라 움직이는 남자가 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누나 집에 얹혀살며,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서 도망치듯 피 터지는 싸움과 거친 섹스 속에서 일시적인 해방을 느낀다. 서로 다른 곳에서 자유를 탐하던 두 육체는 클럽에서 만난다. 남자와 싸우고 코피를 흘리면서도 운전대를 잡으려는 여자와, 그런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던 문지기 남자. 그가 무심하게 남긴 전화번호 하나가 두 사람을 다시 연결한다.

 

*

 

사고가 그녀를 덮친 뒤 몇 달, 여자는 그 번호를 누른다. 동정할 만큼 가깝지는 않고, 자신을 궁금해했던 타인. 그렇게 만난 그들은 함께 물속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그저 수영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물에 뛰어들고, 그녀에게도 같이 하자며 수영을 권한다. 그녀는 진심이냐며 비웃는다. 그 웃음에 그는 옷이 문제냐는 듯 단순하고 무심한 문장을 건넨다. 배려와 위로가 빠진 그 문장이 엉켜 있던 그녀의 마음을 순식간에 풀어놓는다. 수영하고 싶다는 한마디에 그는 단숨에 그녀를 안아 들고 바다로 향한다.

 

물속에서 그녀는 잃어버렸던 자유를 되찾는다. 근육이 움직이는 대로 나아가고,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바꾼다. 물은 다리의 부재를 개의치 않는다. 휘파람 신호를 보내면 그가 다가와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데려다 놓는다. 손짓에 반응하던 범고래처럼, 이제는 그 작은 신호에 응답하는 한 사람이 곁에 있다. 

 

그는 그녀가 잃어버린 자유의 감각을 온 육체로 시연해 보이는 사람이다. 그녀는 그의 거친 싸움판을 따라다니며 노골적으로 생동하는 육체를 눈에 담는다. 땀과 피를 흘리고, 온 근육을 움직이고, 상대를 향해 시선을 곤두세우는 몸. 그의 싸움은 그녀에게 격렬한 생기이자 자신이 알고 있던 자유로움과 가장 닮은 모습이었다. 

 

 

36854_5158da7af184c_still_07[H500].jpg

 

 

다리를 잃은 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몸을 쓰는 일을 그만두었던 그녀가 그로 인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의족을 맞추고, 잘려나간 자리에 왼쪽과 오른쪽을 새겨 넣는다. 사라진 몸을 부정하는 대신 새로 생긴 몸에 다시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그녀에게 두 다리가 돌아온다.

 

그러나 남자가 자유라 믿어온 삶은 그녀에게 있지 않았다.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나고, 필요할 때 사람을 부르고, 필요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것이 자유였다. 그런 그가 직원들을 감시할 카메라를 설치하는 일에 가담하게 된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몸을 통제받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가,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의 몸을 감시하는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그가 꾸려온 삶과 이질적으로 보이는 그 일은 결국 그가 막을 수 있는 주먹이 아닌 방식으로 그를 무너뜨린다. 누나는 직장에서 해고되고, 그를 품어주었던 눈이 어느새 증오를 담고 있다. 

 

그제야 그는 아무리 세상을 휘저으며 달아나도 제 삶이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그가 자유라 불러온 것 가운데 얼마만큼이 사실은 도망이었는지도.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 그는 다시 떠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향이 조금 다르다.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기 위해 달아나는 대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지킬 방법을 찾아간다. 테두리를 벗어나기 바빴던 그가 처음으로 규칙과 코치와 계약이 있는 링에 오른다. 마음껏 휘두르는 주먹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 안에서 자신의 몸을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

 

그러다 얼어붙은 호수 아래로 아들이 사라진다. 다시 쌓아 올리기 시작했던 삶이 힘없이 허물어진다. 아이는 늘 자신의 곁에서, 자신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런 아이를 구하는 법 따위 배운 적이 없다. 처음으로 소리 질러 도움을 구하고 울부짖어도 아무도 없다. 그가 도망쳐 온 끝은 그런 곳이었다. 결국 그는 혼자서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식을 쓴다. 평생 남을 무너뜨리는 데 썼던 주먹으로 얼음 바닥을 내리친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하얀 얼음 위로 번져 나간다.

 

처음으로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지 않기 위해 부서진 손.

 

자신이 떠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여전한 것들이 있어서였다. 얼음을 부수는 순간 그 모든 게 언제든 제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서지는 손끝으로 실감한다. 언제든 그를 품어주던 누나는 한순간에 그를 내쫓았고, 그의 아들은 두 발로 걸어 시야 밖으로 나갈 수 있고, 스테파니 역시 새로 얻은 두 다리로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그들이 곁에 있었다는 것은 떠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떠날 수 있는데도 머무르기를 택한 것이었다. 

 

자유는 정처 없이 달아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머물고자 하는 선택에도 있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막을 새 없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을 향해 몸이 아닌 문장을 쏟아낸다. 힘으로 움켜쥘 줄만 알았던 남자가 처음으로 다친 손을 내밀고 잡아달라 말한다.

 

무서웠다고, 두려웠다고, 곁에 있어 달라고. 사랑한다고.

 

손이 부서진 뒤에야 그의 언어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신호를 보내는 쪽이 그였다.

36854_5158da7a76d6d_still_06[H500].jpg

 

 

사람의 손에는 스물일곱 개의 뼈가 있다. 원작의 작가는 그 뼈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른다. 그리고 주먹이 얼굴에 닿는 순간을 이렇게 쓴다. 입안이 녹과 뼈의 맛으로 가득 찬다고.

 

녹은 피의 쇠맛이고, 뼈는 이의 맛이다. 통증은 자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게 한다. 스테파니가 절단면에 왼쪽과 오른쪽을 새기는 것도, 알리가 얼음 깨지는 소리보다 제 뼈 부서지는 소리를 먼저 듣는 것도 그렇다. 부러진 뼈는 붙으면서 그 자리가 더 단단해진다고 하지만 손의 뼈는 그렇지 않다. 한 번 부서진 손은 이따금씩 통증을 일으키며 상처의 순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사랑은 그 통증과 닮아 있다. 가장 강렬하게 생을 실감하게 하는 감각이자, 상실의 두려움을 안고도 자신의 육체를 타인 곁에 자발적으로 묶어두는 일.

 

<러스트 앤 본>은 상처와 회복의 서사에서 한 걸음 벗어난 곳의 이야기다. 다시 붙지 않는 자리를 그대로 둔 채, 그 부서진 손으로 기어이 타인을 향해 뻗어가는 무모한 몸짓을 담는다.

 

떠날 수 있는 몸으로 머물 곳을 고르는 것. 사랑은 그 선택의 자리에서 숨을 쉰다.

 

 

정희정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Opinion] 데이미언 허스트: 전시되는 죽음 [전시]
  2. 02 [Opinion] 진실의 구조: 추락의 해부(2023) [영화]
  3. 03 [Opinion] NCT WISH: 모서리 가득한 세상에 다정함의 화살을 쏘아 올리다 [음악]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