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원형의 시간을 담은 언어 - 컨택트 [영화]

시간과 언어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
글 입력 2022.08.2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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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컨택트 Arrival'

 

 


무기의 도착


 

어느 날 세계 각 지역에서 12개의 외계 물체가 나타났다. 이 거대한 셀들은 움직이지 않고 공중에 뜬 채로 가만히 있다. 인간의 침입에도 오히려 반기는 듯이 공기압을 조절하고서는 문을 열어준다. 이들이 지구에 온 목적은 무엇일까. 전 세계가 경계하는 가운데 미국의 언어학자 ‘루이스’와 물리학자 ‘이안’이 이들을 파악하기 위해 접촉을 시도한다. 갑옷과 같은 두꺼운 실험복을 입고 최첨단 장비들을 가지고 그들은 커다란 셀 안으로 들어간다. 이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헵타포드', 즉 그리스어로 7개의 다리를 가진 외계 생명체가 내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이 언어인지 아닌지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언어학자답게, 루이스는 일방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한다. 언어란 기본적으로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감하게 슈트를 벗고 직접 ‘소통’에 나선다. 그렇게 알아낸 사실은 헵타포드의 언어가 보여주는 언어, 즉 표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표의 문자란 하나하나의 글자가 언어의 소리와 상관없이 일정한 뜻을 가지는 문자다. 지구의 경우로 따지면 고대의 그림 문자와 상형 문자가 이후 발달된 한자를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의 표의 문자가 원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선 형태의 언어, 보편적으로 한 방향으로 흐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지구인의 언어와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루이스는 앞, 뒤 구분이 없는 언어체계로 인해 이 외계인들의 인지 세계가 다를 수 있음을 직감한다. 이는 후에 등장하는 그녀의 딸 ‘HANNAH’의 이름과도 연결된다. 앞과 뒤가 구분이 없는 비선형 철자법, 대칭어의 언어 특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는 환영들과 그것을 과거의 한 장면인 것처럼 연출하는 영화적 요소에도 이러한 인지 세계가 폭넓게 표현된다. 우리가 시간을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일직선처럼 인지하고 있는 것에 반해 그녀가 보는 환영들은 사실 미래의 기억으로, 현실 속 우리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감독 ‘드니 빌뇌브’는 이것이 과거 회상인 것처럼 시퀀스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나, 점차 익숙해지게 된다.

 


 

처음과 끝이 무의미한 세계


 

관객인 우리는 헵타포드의 언어체계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해할 수 있다. 마치 루이스가 그들의 무기인 언어를 완전히 습득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우리는 그 환영들이 미래임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인식 체계가 영화라는 장치 속에서 잠시 확장됐기 때문이다. 이는 루이스가 셀을 공격하는 전쟁을 막기 위해 중국의 ‘샹 장군’에게 전화를 걸기 전 본 환영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이제 환영이 아닌 헵타포드의 언어체계를 받아들임으로 인지하게 된 세계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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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미 그들의 표의문자가 원형이라는 것에서 미리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대부분 시제를 사용하는 인간의 언어와 달리 이들의 문장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며, 때문에 아주 복잡하다. 문장의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기에, 모든 시간들을 동시에 인지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들의 언어를 습득하면서 점차 그들의 인지 세계를 느끼게 된다. 폭발사고 이후 ‘애봇’의 행방을 묻는 그녀에게 ‘코스텔로’는 “그의 죽음은 진행 중이다”라고 한다. 과연 그는 죽어가고 있을까? 그들의 인지 세계를 보았을 때 현재는 과거와 구분이 없으니 이미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사고에 선행하는 언어


 

언어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영화는 ‘언어 결정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언어 결정론 Linguistic determinism 이란 특정한 언어가 개개인이 환경을 인식하는 데 영향을 주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의 구성원은 환경을 그들과 다르게 지각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생각에는 언어가 완전한 지배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이론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의 구조 간의 차이가 말하는 이의 세계를 구축하고 개념화한다고 믿는다. 물론 우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분명히 머리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가설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속 예시를 통해 이를 이해해 볼 수 있다.

 

중국에서 헵타포드의 말을 해독한 문장으로 “무기를 주다”와 러시아에서 해독한 “시간이 없다. 무기를 사용하라.”가 있었다. 여기서 두 나라는 ‘무기 weapon’이라는 단어를 정치적이고 국가적으로 해석한다. 즉시 연대는 깨지고 전쟁의 공포가 영화의 분위기를 장악한다. 그러나 개념화 방식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루이스는 중국의 경우, 마작을 통한 소통 때문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한정된 틀의 단어에서 만들어지는 사고를 보여주는 예다.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은 못이나 내려치는 행위 같은 것을 자연스레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는 “시간 개념이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주는 무기, 즉 언어를 사용해라.”라고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헵타포드의 언어가 만들어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언어를 습득한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체계를 받아들임과 함께 미래와 현재, 과거를 동시에 인지하게 된다. 헵타포드가 미래에 지구인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이들에게 언어라는 무기이자 선물을 주러 왔다. 그리고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를 사용해 직접 미래로 뛰어들어가 나름의 소통을 한다. 이후 '샹 장군'의 죽은 아내의 유언을 전달하며 자신이 미래를 알 수 있음을 언어라는 매개체, 즉 유언을 통해 전쟁을 막는다. 외계인과 지구인이 도움을 주고받는 이 관계 또한 원형이다. 처음과 끝은 알 수 없지만 언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인식 체계가 변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원형의 세계를 통해 추구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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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루이스가 받은 무기와 그것을 대하는 자세다. 남편과 이별하게 되고 사랑하는 딸이 희귀병으로 열두 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알면서 받아들인다. 혼란도 있었다. 마지막에 남편이 될 이안에게 끝을 다 알면서도 다시 똑같이 살 수 있을까라고 물을 때 이안은 그녀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며 현재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당신의 품이 이렇게 따뜻한 걸 잊고 있었어.” 이미 경험한 것과 다름없는 세계로 그녀는 저항 없이 발을 들인다. 한순간 한순간들의 중요성, 즉 현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헵타포드 어를 모르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영화를 감상한 뒤 한 말이 떠올랐다. 시인은 단어를 모으는 사람에 가깝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세계가 나의 한계를 뜻한다고 말했던 루드비히의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는 말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면 모든 것이 당연해지고 허무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그들은 살아서 지구에 왔고 훗날 받을 도움을 위해 지구인에게 언어를 가르친다. 실은 이미 지구의 언어를 알고서 왔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이 삶을 대하는 자세가 언어체계에 녹아있기에 루이스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를 묵묵히 품고 살 수 있었던 것일까. 언어 결정론에 따르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언어를 연구하는 흥미로운 관점을 잘 풀어낸 영화, ‘콘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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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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