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저물어 가는 트랙 위에 두고 온 것과 두고 올 것 – 스프린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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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스프린터>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라고 했던가.
어떤 누구도 정상의 자리를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고, 전성기에만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내려와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는 ‘자연스럽게’ 찾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이러한 ‘때’를 마주했을 때,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참 쉽지 않다. 심지어 그 때를 마주했을 때는 이미 초라하고 뒤처진 모습이기에 그 시간은 더욱 서럽고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미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 무엇을 두고 올지, 어떤 뒷모습을 남길지는, 그동안 어떻게 달려왔는지 만큼이나 중요하다.
최승연 감독의 영화 <스프린터(2023)>는 이렇게 트랙을 ‘떠나야 할 때’를 맞닥뜨린 세 스프린터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보여주는 비슷한 듯 다른 뒷모습을 담담하게 조명한다.
트랙 위에 있는 10초 동안 모든 결과가 결정되는 단거리 달리기는 우리의 인생과 많은 면에서 다르겠지만,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에게도 결국은 달리던 트랙 위를 내려와야 할 때가 찾아온다. 그 때에 우리는 어떤 뒷모습을 남길 수 있을까?
영화 속 저물어 가는 트랙 위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선 세 선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선 각자의 트랙 위에 무엇을 두고 왔는지, 무엇을 두고 올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저물어 가는 트랙 위에 두고 온 것과 두고 올 것
영화 <스프린터>는 같은 트랙 위에서 경기를 치르지만, 각기 다른 시간을 달리고 있는 세 선수, ‘현수’, ‘준서’, ‘정호’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르는 트랙 위에서 10초 남짓한 시간을 공유한 그들은 비슷한 듯 다른 각자의 간절함과 불안을 안고 있다.
현수는 한때 한국 신기록을 두 번이나 갈아치울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지만, 현재는 무소속으로 이번에야말로 정말 ‘끝’일지 모를 대회를 혼자 준비한다. 운동장 구석에서 혼자 스프린트를 반복하는 현수의 모습은,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소리와 대비되어 더욱 외롭게도 비장하게도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대회를 준비하는 현수의 모습은 그가 선수로서 지나온 시간 중 아주 일부일 뿐이겠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그가 노력해온 참 길고 고단했을 시간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노력과 그가 이루어냈던 빛나는 결과들이 무색하게 결국 현수에게도 트랙을 내려와야 할 때가 눈앞까지 다가온다.
"더 하고 싶은데, 잘 안 되니까“
"잘했어. 계속 1등만 할 줄 알았어? 이제 그만할 때 된거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했던 대회가 끝나고 현수와 아내 지현이 나누는 대화 속 현수의 마음은 너무나 가깝게 다가온다. 많은 것을 이루어냈지만 그럼에도 트랙을 떠나는 마음에는 여전히 놓을 수 없는 아쉬움과 속상함, 복잡한 감정들이 가득 차오른다.
마냥 털어 놓을 수 없는 미련을 가득 안고 저무는 트랙 위에 현수는 무엇을 두고 왔을까. 어쩌면 애써 미뤄왔을 그 ‘때’를 마주한 현수는, 그 감정과 별개로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이 고수해온 노력을 마지막까지도 계속해냈고, 적어도 트랙에 오르기 위해 보냈던 긴 시간들에 떳떳한 모습으로 트랙 위에서 내려왔다. 트랙 위 현수의 마지막 뒷모습은 그가 원했던 모습과 달랐을지 몰라도, 그 때문에 그가 지나온 시간들이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를 마주한 정호의 선택은 현수와는 달랐다. 정호는 한국에서 가장 빠른 단거리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지만, 컨디션도 기록도 안 좋아지기만 하는 상황에서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하게 되고, 결국 약물에 손을 댄다.
그리고 부정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정호는 트랙 위를 도망치듯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이 트랙 위에 서기 위해 지나온 시간을 부정당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그 시간들 속의 자신과도 제대로 작별인사할 기회를 스스로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정호가 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의 장면은 현수의 장면과 얼핏 비슷해 보였지만 참 많이 달랐다. 두 장면 모두 조용하고 어둡게 연출되었지만, 꾹꾹 눌러 놓았던 현수의 진심이 새어나온 장면과 달리, 정호의 코치가 도핑 테스트 결과를 전달받으며 하는 뻔한 거짓말들은 대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그 장면에서 정호가 그동안 보냈을 긴 시간이 슬프도록 허무하게 느껴졌다.
원하던 결과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 때문에 결과에 떳떳할 수 없는 정호의 뒷모습은 오히려 나아갈 이유와 방향을 더 이상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화는 결말의 힌트만 제시한 채 끝났지만, 정호가 스스로 자초한 자신과의 불화 안에서 어쩌면 꽤 오랜 시간 더 괴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현수와 정호가 마주했던 ‘때’를 갑작스럽게 직면한 준서는 둘과는 또 다른 선택을 한다. 준서는 고교랭킹 1위 선수이지만 전혀 기록이 향상되지 않은 채 3학년이 되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게 육상밖에 없어서’ 열정이나 노력 없이 관성처럼 달려왔던 준서는, 갑작스레 육상부가 사라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을 건 대회를 준비해보기로 한다.
비록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끝’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준서 역시 전혀 향상되지 않은 기록을 가지고 진퇴를 결정해야 하는 3학년이 되었다는 점에서 현수나 정호가 마주해야 했던 ‘때’와 준서가 마주해야 한 ‘때’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육상해서 뭐하냐, 마지막엔 결국 울면서 끝난다니까. 그때 엄청 허무해.“
육상부가 해체되어야 오랫동안 바라던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상황에 갈등하는 코치 ‘지완’은 준서가 계속 달리더라도 그 끝은 결국 너무 허무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한때 가장 높은 자리에서 좋은 기록을 가지고 달려가던 현수와 정호도, 트랙 위에서의 마지막은 영광스럽기보단 허무하고, 웃음보다는 울음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 속의 마지막 모습들이 현실 속 각자의 트랙 위에서 달리는 대부분의 우리의 모습과도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꼭 육상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정점을 지나 점점 ‘끝’을 실감할 때, 이제는 정말 달리던 트랙에서 내려가야 할 그 때에, 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엔 결국 울면서 끝나더라도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도망치듯 트랙을 떠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미련을 두고 트랙 위에서 저물어 가는 것도, 결국 모두 울음으로 마무리되는 쓸쓸한 마지막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지나온 시간에 떳떳할 수 있는 모습을 남기고 내려오는 것은 그동안의 시간을 자신만의 자원으로 만들어 주고, 새로운 트랙 위로 나아갈 용기를 더한다.
그리고 영화는 트랙 위에서의 시간이 그저 저물기 위해 달렸던 시간처럼 느껴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달리기 위해 땀 흘렸던 시간 그 자체는 누구라도 존중받아 마땅함을, 담담해서 오히려 다정한 앵글로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서 각기 다른 듯 비슷한 때를 마주하여 달리는 현수, 정호, 준서는 같은 트랙 위에 있지만, 어쩌면 서로의 삶 속에 있었을 서로 다른 세 개의 시간을 달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비록 세 명은 비슷한 상황에서도 각자 다른 선택을 했기에 그들의 삶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리겠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어쩌면 서로였을 지도 모를 각기 다른 시기의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영화는 그러한 세 스프린터의 모습을 한 발자국 뒤에서 비추며, 관객들이 스스로 화면에 담기지 못한 시간의 부재와 대사의 여백을 채우고,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을 더 가깝게 느끼도록 유도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더욱 쉽게 각각의 인물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게 되고, 자신만의 트랙 위에 선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기에 뚜렷한 주인공을 두지 않고 세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되는 이야기 구성도 자신만의 트랙 위에 선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존중이자 위로처럼 다가왔다. 경기에서는 10초 남짓한 찰나의 시간으로 트랙 위에 서기까지 보낸 긴 시간의 결과가 결정되지만, 영화는 그 결과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각각의 인물들이 보냈을 길고 고된 시간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연출과 이야기 구성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자신만의 트랙 위에 서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되게 지나왔을 우리 모두의 시간도, 단지 현재 마주하고 있는 어떤 상태나 결과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다.
"고맙다. 잘 해줘서 고맙다고.“
지완이 대회를 마친 뒤 준서에게 건넨 인사는 준서와 지완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와 상관없이 준서가 노력해 온 시간과 앞으로 보낼 시간에 대한 지완의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이 인사가 자신만의 트랙 위에 선 우리에게도 닿을 수 있는 것이었으면 한다.
그래서 각자 자신만의 트랙 위에선 모두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시간을 달리든, 지나온 시간들 속의 스스로와 제대로 인사할 수 있기를, 결국 마지막에는 울면서 끝나더라도 저무는 트랙 위에 나름대로 멋진 뒷모습을 남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효중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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