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사회
‘트라우마’란 말은 이제 의학의 영역을 넘어 일상적 용어가 되었다. 우리는 수많은 경로를 통해 각종 재난, 사고, 범죄로 희생된 누군가에 대한 소식을 접한다. 그러나 그런 소식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넘쳐 나는 뉴스들과 달리 피해자, 희생자, 생존자들의 목소리는 도통 들리지 않는다. 상처가 만연한 사회에서, 상처를 ‘말하고 듣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양석원의 『트라우마 말하기』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상처의 ‘증인’과 ‘청자’를 소환하는 책이다. 그 최종적인 부름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고전 심리학, 신경과학, 정치학, 서사학, 역사학, 윤리학을 넘나드는 긴 여정에 함께하게 된다. 이 책의 가치는 의미 있는 결론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학자들의 주장과 논의가 어우러지며 열리는 방대한 세계에 있다. 저자가 정성스레 닦아놓은 길을 따라 천천히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마침내 그 모든 걸음을 거두어들이는 마지막 문장에 도달하는 희열은 그 어떤 등산, 혹은 등반의 경험에도 견줄 수 없다.
이 책은 트라우마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1부, 생존과 증언 및 트라우마 재현의 문제를 다루는 2부, 트라우마의 감정과 서사를 다루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3부의 주장을 중점적으로 다루되 그것을 뒷받침하는 1부와 2부의 논의를 먼저 살피도록 한다. 트라우마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트라우마를 재현할 때 맞닥뜨리는 어려움을 살펴본 뒤 그것의 타개 가능성을 서사와 말하기에서 찾을 것이다.
상처의 과학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전쟁신경증을 연구하면서 트라우마를 자아의 보호막을 꿰뚫고 들어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신적 상처로 정의했다. 그는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외상 기억을 억압하는 저항을 극복하고 자아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카디너(Abram Kardiner)는 외상 경험이 야기하는 적응력의 파괴와 자아의 축소에 동반되는 감각적·신체적 장애에 주목하며 트라우마와 신체의 관계를 생리 신경증의 개념으로 논한다. 그에게 트라우마의 치유는 행동 체계가 외상적 사건에 의해 파괴되기 이전의 상태로 환자의 기억을 회복하는 것이다.
한편 자네(Pierre Janet)는 외상 기억이 무의식에 억압된다고 주장하는 프로이트와 달리 외상 기억이 잠재의식에 고착된 표상으로 해리되어 외상적 증상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이 해리 매커니즘은 의식이 지각의 일부만 허용하는 의식의 축소다. 따라서 트라우마의 치유는 해리된 의식을 재통합하고 이 과정에서 상실한 기억을 회복하거나 외상 기억을 다른 기억으로 대체하며 정신적 에너지의 과도한 소비를 줄이고 재충전하는 것이다.
자네의 이론은 트라우마의 발생과 치료에 관한 연구에 신경과학이 가져온 패러다임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외상 기억 역시 의식적인 외현적 기억과 분리되어 암묵적이고 비의식적인 기억으로 저장된다. 트라우마의 스트레스는 의식적인 외현적 기억에 장애를 유발하지만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의 기능은 활성화해서 비의식적, 암묵적 기억을 증폭시킨다. 따라서 트라우마 치료의 초점도 의식과 언어의 차원에서 신체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신경과학적 전회와 함께 발전한 새로운 트라우마 치료법들은 그 효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환자를 주체가 아닌 대상, 더 넓게는 인간을 뇌와 신체의 물질적 차원으로 환원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트라우마는 정말로 신체에 각인된 기억일 뿐, 우리가 능동적으로 발견하거나 재구성하는 대상이 될 수 없는가? 이처럼 트라우마 치료의 변화는 신경과학과 정신분석 및 인문학이 인간과 주체성에 대해 부단히 대화할 필요를 시사한다.
생존자의 침묵
트라우마는 죽은 자가 아닌 생존자가 겪는 고통이다. 캐루스(Cathy Caruth)는 생존자가 죽음뿐 아니라 생존도 이해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생존의 트라우마적 성격을 논한다. 트라우마의 과거를 떠나 미래로 향하는 ‘떠남’과 ‘깨어남’의 개념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이해하려는 반복적 시도이고 파악할 수 없는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생존자에게 트라우마가 종점이 아닌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성을 제시한다.
침묵과 발언 모두 상처가 드러나는 방식일 수 있지만, 침묵과 달리 발언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증언은 일차적으로 목격한 사건의 사실적 보고지만 모든 증언에는 개인의 체험에 기초한 관점과 가치판단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객관적 사실성 이외에도 진실성의 측면을 지닌다. 펠먼(Shoshana Felman)은 생존자가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증언을 말하는 서사적 수행이 곧 역사적 진리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진리의 구성은 증인뿐 아니라 청자도 요구한다. 증인과 청자가 상호주체적이고 공감적인 대화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할 때 진정한 증언이 완성된다.
그러나 생존자가 느끼는 비현실감과 공허감은 생존자를 침묵하게 한다. 말하려는 증인과 공감적인 청자로 구성된 이상적인 증언 공동체가 있어도 증인은 결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 이러한 트라우마의 ‘증언 불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학자들의 의견이 존재한다. 아감벤(Giorgio Agamben)에게 증언은 트라우마 경험의 밖에 있는 자가 안에 있던 자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의 구별이 불가능한 관계,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경계, 즉 인간성 안의 비인간성에 대한 증언이다. 아도르노(Theodore Adorno)는 아우슈비츠를 전달할 수 없고 심지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현대 문화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본다. 리오타르(Jean Francois Lyotard)에게 아우슈비츠는 말해지지 않고 문장화되어야 할 긴급성이 가장 크지만 말해지지 않고 남은 것이 문장화되기를 기다리는 고통이 가장 큰 사건이라는 점에서 현시될 수 없는 것의 표본이다.
상처와 이야기
반면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재현할 수 없는 것의 범주가 사라진 현대의 미학적 예술 체제에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사건을 재현하는 특별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존재한다. 리쾨르(Paul Ricœur) 역시 서사가 트라우마라는 불일치적 요인으로 인해 극단적인 자기 소멸을 경험하는 생존자에게 허락된 자기 탈환과 재형성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트라우마 서사는 서사 이론의 관점에서 이야기와 플롯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트라우마 환자는 과거의 사건을 역사적인 시간에 따라 자신 삶의 일부로 진술하면서 동시에 그 사건을 중심으로 삶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이질성과 독특성을 동일성으로 환원하지 않고 이질적 사건이 서사의 진행에 기여하는 가능성을 언급한다.
프랭크(Arthur Frank) 역시 상처 주변을 맴도는 ‘혼돈 서사’를 넘어 혼돈을 포함하고 수용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으로 ‘추구 서사’를 제시한다. 이는 고통과 시련이 서사의 동력이 될 가능성과 고통과 혼돈을 포함하는 새로운 이야기로 삶을 다시 쓰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사적 치유는 문제의 제거나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포함할 수 있는 서사로 삶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삶을 다시 다르게 살 수는 없지만 삶의 이야기는 다시 쓸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리쾨르의 문장으로 함축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작가가 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의 내레이터와 주인공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아프니까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 의하면 고통의 본질은 무의미, 즉 ‘쓸모없는 것’이다. 타자의 쓸모없는 고통을 나의 의미 있는 고통으로 바꾸게 만드는 것은 오직 상호인간성의 윤리적 명령뿐이다. 그리고 이 명령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상처와 고통의 보편성이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해야 할 상처에 대한 공감의 윤리가 절실한 트라우마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철학적인 성찰을 제시한다.
트라우마가 인간 경험의 한 극단을 통해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면 그것은 ‘고통’일 것이다. 절대적인 고통의 힘 앞에서 인간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오직 생존이라는 기능만이 남은 물질적인 기계로 전락한다. 아우슈비츠의 무젤만(muselmann, muslim)이 그러한 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없지만 우리는 그들을 연민할 수 있다. 비록 그들과 같은 것을 경험할 순 없어도, 고통 자체는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
트라우마를 말한다는 것은 손댈 수 없는 날카로운 파편으로 남아 고립되어 있던 고통의 순간을 가져와 우리 삶의 또 다른 퍼즐 조각으로 맞추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나’가 ‘우리’일 때 가능하다. 상처가 고통의 흔적이라면 우리는 모두 상처투성이지만 그래서 서로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네가 말하려는 것이 곧 내가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책을 끝맺으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우리는 상처 없는 세상에는 살 수 없지만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세상에는 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와 공감의 윤리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상처가 있었던 곳에 말하기가 있을 것이고, 상처를 말하는 곳에 공감하고 경청하는 응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