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아직 칼바람이 한창이던 때 친구들과 만나면 냅다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그 노트를 내밀며 부탁했던 것은 친구의 이름, 그리고 지금 떠오르는 단어 세 가지였다.
이렇게 뜬금없는 단어 수집을 시작한 이유는 박지현 작가의 <도파민 - 세 개의 단어, 그리고 십 분 2>라는 책 때문이었다.
작년쯤 연남의 한 독립 서점에서 구매한 이 책은, 작가가 세 개의 단어로 10분대의 시간 동안 써낸 초단편 소설들을 엮어낸 책의 두 번째 시리즈이다. 각각의 소설은 물론 그와 어울리는 삽화,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 실린 희곡까지 전부 박지현 작가의 작품이다.
책을 읽다 보면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다른 소설집과는 사뭇 다른 낯선 풍경을 볼 수 있다.
소설의 제목, 소설의 바탕이 된 세 단어, 마지막으로 소설을 작성하는 데 걸린 시간. 작품을 창작하는 데 주어진 세 단어는 처음부터 한 그룹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대체 어쩌다가 이 단어와 이 단어를 함께 떠올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 제목과 단어들을 통해 유추한 내용이 실제 소설의 내용과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단어들의 조합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소설을 읽기 전 창작 배경을 훑는 순간부터 정말 책의 제목처럼 도파민이 샘솟는다.
20분 이내의 짧은 작성 시간을 보면 치열한 텍스트의 마라톤을 치렀을 작가의 모습이 상상된다. 작성 시간 자체는 길지 않지만, 소설의 구상부터 실제로 작성해 마지막 단어를 입력하기까지 그 안에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기나긴 설득의 과정이 있었을 테다.
대부분의 소설은 대체로 열린 결말의 형식이라 장편소설의 도입부 같은 느낌이 드는데, 몇몇은 그 자체로 완전한 작품처럼 읽히기도 한다. 더불어 단편소설 모음 뒤에 실린, 소설의 내용을 확장한 대본들을 읽다 보면 대사나 지문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어 앞서 소설을 읽으며 들었던 의문점들을 해소할 수 있다.
가장 의뭉스러우면서도 흥미로웠던 작품은 <패트로 자끄>라는 작품이었다. 주어진 단어부터 [하체, 논문, 찜닭]이라 작품을 구상할 때 굉장히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미스테리한 SF 소설의 분위기를 띠면서도, 실험의 주제가 '사랑'이라는 점에서 더욱 상상의 나래를 자극한다. 대본에서도 이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속 의문의 남성인 '패트로 자끄'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아서, 어쩌다가 이러한 이야기와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이 소설은 잠들어 있던 나의 글쓰기 근육을 깨워준 책이다. 글을 쓰는 행위가 의무처럼 재미없게 느껴졌던 당시, 작가의 창작 방식을 보고 글을 쓰는 재미를 되찾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게 익숙하고 내가 좋아하는 단어에서 멀어져 타인의 시각을 잠시 빌려올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도로 이 단어들을 내게 건넸을까, 하며 짐작해 보곤 그 의도에 완벽히 맞추기도 하고 부러 그 의도에서 멀어지기도 하면서, 창작의 세계를 넓혀나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