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

이 글은 소설 「산책자의 행복」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산책자의 행복.jpg

 

 

들어가며


 

조해진의 「산책자의 행복」은 2016년 제17회 이효석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작가 인터뷰에서 ‘실존과 생존, 부재와 존재 등 철학적 고민이 깊다’는 인터뷰어의 언급에 그녀는 ‘삶과 죽음에 대해 원론적으로 생각하는 학문이 철학’이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래서인지 「산책자의 행복」에는 실존주의적 함의가 엿보이는 지점이 곳곳에 존재한다. 철학과가 통폐합되면서 대학에서 밀려난 전직 강사 홍미영이 거대한 불안 속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은 인간이 본래의 순수함을 되찾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산책자의 행복」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메이린, 즉 홍미영의 옛 제자는 홍미영의 실존주의적 가르침을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왔다. 그녀에게 홍미영은 단순한 교수자가 아닌 ‘라오슈’이다. 그녀는 자취를 감춘 홍미영에게 계속해서 메일을 보낸다. 그러나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되어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잃고 자신의 가르침을 ‘배신’하게 된 홍미영은 메이린의 메일을 전부 외면한다. 이러한 부름과 외면의 교차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실존의 얼굴이 두 사람 안에서 눈뜨게 된다.

 

 

 

퇴락한 인간들의 도시


 

6PjvTOuLmeRXpczK3_DyvKsAsksWq3_ynm81Q3p3UVSwJtX7vYHBVv-eGB2i75Cykf1fJ8gIpEqYIMkPSnPXoYbx75ehbsedanjk.jpg

 

 

하이데거는 철학이 하나의 학문 혹은 세계관이라는 당시의 주된 인식과는 달리, ‘철학은 곧 철학함이며, 철학함은 곧 인간으로 존재함이다’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삶 자체가 철학함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한 누구나 철학 안에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철학자인 우리가 철학이란 것에 새삼스럽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일상에서 억압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구분에 따르면 ‘존재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뜻하며 ‘존재’는 존재자가 나타나는 근원, 즉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있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가 ‘현존재’,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지만, 대다수는 눈앞의 일상적인 것들에 몰입하여 이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 이러한 상태를 ‘퇴락’이라 하며, 퇴락에 빠진 자들을 ‘세인’이라 한다. 세인들은 자신의 본래성이 은폐된 채 비본래적 삶을 살아가게 된다.

 

홍미영과 메이린, 이 두 명의 주인공이 참된 자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처해있는 환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미영은 대학의 인문학과들이 전국적으로 통폐합되는 분위기 속에서 교수직을 잃는다. 홍미영의 전공은 ‘철학’이다. 조해진의 표현에 따르면 철학은 ‘삶과 죽음에 대해 원론적으로 생각하는 학문’이다. 하이데거식 명명에 따르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렇듯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있는 철학이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면받는 이 세상은 일상성에 매몰된 세인들의 사회, 즉 퇴락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적 특징은 자신의 거주지에 대한 메이린과 홍미영의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작품의 초입에서 메이린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간혹 그런 사람을 상상해봅니다. 이 도시의 시립병원에서 태어난 뒤 도시 안에 있는 학교와 직장을 다니다가, 생애가 소진될 즈음 다시 그 시립병원으로 돌아가 임종을 맞은 사람, 그러니까 이 도시에 있는 건물들을 옮겨 다닌 물리적인 이동이 삶의 전부인 사람……어쩌면 그런 삶이 이 세계의 표준인지도 모르겠어요.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어 지금은 이곳에 있지만 제 삶에도 새로운 것은 없으며 그저 몇 개의 동일한 일상과 감정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니까요.
 

 

새로운 것과 일상의 구분은 반복성에 있다. 동일한 것이 동일하게 반복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위 인용문에서의 ‘물리적인 이동’은 표면적이고 물질적인 것, 즉 인간의 본래성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 일상을 표상한다. 따라서 메이린이 상상하는 사람은 반복되는 표면적 일상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세인’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작품의 주된 배경인 M시는 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신도시이다. 홍미영이 M시에 이사 왔을 때 M시는 ‘유령의 은신처처럼 황폐’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 ‘병원과 아파트와 학교, 그리고 관공서와 사무실들로 가득 찬 건물들과 교회를 지나’면서 그녀는 ‘누군가의 삶을 펼쳐놓은 것 같은 거리는 M시에도 있’다고 말한다. 빠른 속도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M시에서는 ‘중심지에서 먼 골목’조차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의 삶을 펼쳐놓은 것 같은 거리’, 즉 현대인들의 일상과 편의를 위한 공간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따라서 M시 또한 메이린의 거주지와 마찬가지로 세인들의 퇴락한 공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살아있다는 감각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고 말한다. ‘실존’이란 살아있다는 사태 그 자체다. 이는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이 이성에 있다고 보았던 기존의 형이상학적 서양 철학과는 달리, 인간은 우연히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이며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에 주목하겠다는 선언이다. ‘현존재’의 원어인 ‘Da-sein’은 ‘거기’를 뜻하는 ‘Da’와 ‘있음’을 뜻하는 ‘sein’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거기에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거기’는 현존재가 관계를 맺는 세계를 가리킨다. 현존재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함, 즉 단일한 존재자로서의 각자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세계 속의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기는 의미 안에서 존재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특성을 ‘세계-내-존재’라 한다.

 

‘실존’에 대한 위와 같은 사유는 친구 이선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메이린에게 홍미영이 건넨 말에 그대로 담겨있다.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구나. 그 순간, 라오슈의 그 말이 알을 깨고 나오는 작고 연약한 생명체처럼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눈을 뜨고 깃털을 돋우는 듯했습니다. 떠올릴 때마다 경이로운 그 말을, 라오슈, 저는 한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구나.” 이 한 마디는 메이린의 마음속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녀가 홍미영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메일을 보내는 계기가 된다. 즉 이는 메이린에게 있어 홍미영을 단순한 교수자가 아닌 ‘라오슈’로 만든 말이자 이 소설의 핵심 구호라고 볼 수 있다. 실직과 어머니의 병환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며 ‘세인’으로 퇴락해버린 홍미영은 자신의 가르침을 ‘배교자의 언어’라 표현한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진실한 제자 메이린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은 이 말은 그녀가 침묵하는 순간에도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었고, 결국엔 그녀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는 존재가 인간과 관계 맺는 방식 중에서 가장 고유한 관계 방식이다. 언어는 사물을 불러내는 것, 이름 짓는 것이다. 이름이란 단순히 어떤 것에 붙여진 지시적 기호가 아니라 하나의 명령처럼 거기에 있게 하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기도 하고 부재하게 하기도 한다. 이를 언어의 ‘은폐성’과 ‘비은폐성’이라 한다. 자신의 존재에 무관심한 일상인들의 언어는 존재를 ‘은폐’시키는, 즉 지워짐의 언어가 되고 자기 존재에 대해 깨어있는 자, 즉 시인의 언어는 존재를 개시해주는 ‘비은폐’가 된다. 이러한 사유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명제 속에 함축되어 있다.

 

삶의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던 메이린을 눈뜨게 한 홍미영의 말은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비은폐’의 언어이다. 이 말로 인해 메이린은 친구의 죽음을 단순히 애도하는 것에서 나아가 존재와 부재에 대한 성찰에 도달한다. 이제 그녀에게 이선은 ‘영원이라는 시작도 끝도 없는 선 위에서 점멸하는 작은 점’이 되었고 부재로써 존재하게 되었다. “어떤 언어가 라오슈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걸까요. 행복한가요, 라오슈?”라는 메이린의 물음은 그녀에게 비은폐의 언어를 들려준 홍미영이 이제는 생존의 압박과 은폐의 언어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앎에서 기분으로


 

하이데거의 메시지를 압축하면 세속에 물든 비본래적 삶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을 깨닫고 본래적 삶을 되찾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인간은 살아있음 그 자체로 이미 철학하고 있다. 즉 ‘존재의 선이해’와 ‘존재의 망각’이라는 이중적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심정적 이해’이다. 여기서 ‘근본심정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의 본래성을 일깨우는 주요한 심정적 태도로서 ‘불안’을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불안의 특성을 밝히기 위해 공포와 비교한다. 불안과 공포의 공통점은 ‘도피’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한다. 그러나 불안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 하지만 그 대상이 뚜렷하지 않다. 세인들은 이처럼 알 수 없는 불안을 외면하기 위해 일상의 구체적 대상들에 골몰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정말 강한 불안이 들이닥치면 이러한 대상들은 쑥 떠밀려 가고 오롯이 자기 자신만이 남게 된다. 이를 ‘단독화’라 하며, 순수한 단독자로서의 자신을 마주하면서 현존재는 비로소 본래적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불안이 드러내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이때의 죽음은 단순한 물리적 끝이 아닌 모든 가능성의 끝, 즉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이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며 벗어날 수도 없고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도 알 수 없는 모든 가능성의 종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죽음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 즉 심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때는 죽음에 매혹된 적도 있었다. 그녀가 흠모했던 철학자들은 죽음을 전제한 존재의 성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그들처럼 미래의 죽음을 떠맡으며 강인한 현재를 살기 위해 애썼다. 그녀에게 죽음은 구체적인 단절이 아니라 존재를 완성하고 성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추상적인 과정이었다.
 


홍미영의 회상에서 등장하는 철학자는 여러모로 하이데거를 연상시킨다. ‘미래의 죽음을 떠맡으며 강인한 현재를 살기 위해 애썼’던 그녀는 실존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지식일 뿐, 그녀가 몸소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새벽의 편의점 안에서 홍미영은 자신이 강의실에서 했던 말들을 바닥에 널어놓고 자신을 조롱하는 손가락의 환영을 본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고 믿어왔던, 강의를 통해 타인에게 손쉽게 전수할 수 있다고 여겼던 ‘지식’의 허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환각을 견디는 동안 그녀는 메이린에게 줄곧 묻고 싶었던 말을 떠올린다. “사는 게 원래 이토록 무서운 거니, 메이린?” 

 

생활의 토대를 잃고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겁에 질린다. 그러나 그 대상은 명확하지 않고 환각을 통해서만 어렴풋하게 드러날 뿐이다. 퇴근길에 커다란 검은 개를 마주친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도망친다. 그러나 돌멩이를 내던진 순간 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현존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불안이 비추는 죽음의 형상이다. 책을 통해 접하는 것이 아닌, 불안이라는 ‘기분’을 통해 피부로 느끼는 죽음이다. 진정한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환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삶을 결심한다는 것


 

개가 사라진 뒤 그녀는 걷기 시작한다. 끝을 알 수 없고 목적도 없이 뻗어있는 길 한가운데에서, 이윽고 그녀가 속삭인다. “미치도록 살고 싶어.” 바로 다음 단락에서는 메이린의 메일이 이어진다. 메이린은 홍미영에게 계속해서 메일을 보낸 것이 홍미영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또 하나의 부재를 떠맡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미루고 미루었던 진심을 전한다.

 

 

저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다예요, 라오슈…

 

 

두 사람의 마지막 말은 낭떠러지 끝에 내몰린 자의 비명 내지는 흐느낌처럼 들린다. 그러나 수많은 청중 앞에서 경건하게 읊는 선서와도 같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이야기는 막이 내렸고, 이 뒤에 그들의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살아있음’에 대한 그들의 선언과 그것에 담긴 빛나는 결의가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알린다. 불안을 통해 죽음과 직면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 내던져졌고 그렇기에 삶이 주는 고통은 너무나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부조리에 맞서거나, 굴복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부조리에 굴복하는 유형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삶의 고통과 함께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불안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이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 속에 숨어있는 책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탄생을 선택할 수 없었지만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죽음의 거대한 그림자 앞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낀다. 죽음이 앗아가는 우리의 모든 가능성은, 설령 그것이 고통에 가까울지라도 그 자체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유한한 가능성을 유한하게나마 끌어안고자 하는, ‘살고 싶어’ 하는 우리 자신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를 책임질 필요가. 이 책임을 준수하고 자신의 참된 존재를 실현하기로 선택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선구적 결의’라 명명한다.

 

“미치도록 살고 싶어”, 그리고 “저는 살아있습니다”라는 단순한 말들이 사뭇 비장하게 들리는 까닭은 그것들이 이 모든 과정을 거쳐 탄생했기 때문이다. 삶의 의지는 고통의 부조리 앞에 한풀 꺾일 수는 있어도 언제나 먼저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참된 존재로서의 진정한 삶을 실현할 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면 조해진이 말하는 삶이란 산책이며, 행복이란 불행의 반의어가 아닌 ‘가능성의 가능성’이다. 

 

산책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사람은 행복하다. 

그의 앞에 길이 펼쳐져 있고, 그의 모든 걸음이 산책이 되기에…….

 

 

 

이지선.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