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바다에서 수영하듯 소설을 쓰는 삶 [도서/문학]

소설 쓰는 삶을 살고 있다
글 입력 2023.08.23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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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삶을 살고 있다. 깊지만 투명한 바다를 수영하는 기분이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을 때 나는 내가 소설 창작에 어느 정도의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 그게 단단한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덴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설을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소설을 왜 쓰고 싶은지, 내가 정말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지 곧 여러 고민에 빠져서 작년 몇 달 동안 소설을 쓸 수 없었다. 그럼에도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단순히 좋아한다는 마음이라기보단 장력 같았다. 소설에게 강하게 끌어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구나, 선택이라기보단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소설 창작이 비주류라고 여기겠지만 소설 쓰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소설 창작 클래스를 다니면서 문학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 소설 쓰는 걸 목격했을 때, 그들 또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걸 알고선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다. 나의 사담도 누군가에게 위로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소설을 쓰면서 갖춘 관념이나 깨달음, 감상을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광활한 바닷속, 나와 소설 사이에서 헤엄치기



소설을 쓰다 보면 내 경험을 하나둘 넣게 된다. 소설 창작은 인물과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일인데 내가 세세하게 아는 사건은 결국 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간단한 에피소드부터 깊은 마음의 상처까지 종류가 다양하지만 소설을 처음 쓰는 이들은 주로 후자를 소설에 담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랬다. 꾹꾹 눌러 담아 놓았던 결핍과 상처를 글로 쏟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에 매료되었고, 더 정확하게는 의지했다. 소설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쓰는 일도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어두컴컴한 바닷속에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수온이 무척 따뜻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그 따뜻함에 일단 앞으로 헤엄쳤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쓴 세 편 정도의 소설이 내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소설들을 합평 받으면서 무언가 잘못 나아가고 있다는,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서서히 짙어졌다.

 

독자들은 모른다. 모든 소설이 그렇겠지만 소설에 나의 이야기를 담을 경우 내가 아는 이야기를 독자는 더더욱 모른다. 바꿔 말하자면 내 이야기는 독자가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은 작가의 메시지를 담는 창구이지만, 결국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다. 소설은 읽히기 위해 창작되고 소설을 읽는 이는 독자이므로 그들을 완전히 빼놓고 오로지 나의 이야기만 쓸 수는 없다는 뜻이다.


나는 내 이야기로 소설을 쓸 떄 오로지 나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감정이 과잉 상태였고 그걸 쏟아내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러다 보니 소설 속에 독자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자꾸만 집어넣게 되었다. 나는 낱낱이 다 알고 있는 내 이야기이므로 서술할 때 나도 모르게 건너뛰거나 삭제하는 부분이 생긴다. 내가 느낀 걸 그대로 썼는데 독자들은 이해하기 힘들다거나 감정선이 어색하다는 평을 받으면 그들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아, 내 이야기는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구나.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소설에 내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쓴다고 해도 작은 에피소드 정도를 응용하기만 한다. 독자가 내 이야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에게까지 쓸모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야기는 소중하고 그것이 결핍이나 상처일 경우 더욱 그렇다. 그저 분리가 필요할 뿐이다. 작가와 화자를 분리하고 나와 소설을 분리해야 한다. 그것들을 하나로 합칠수록 나도, 독자도 힘들어진다는 걸 학교 수업과 동아리에서 많은 합평을 거치며 깨달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나와 소설을 분리할 필요는 없다. 나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소설을 쓰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쓰다 보면 창작에 대한 방향성과 메시지, 목적 등을 고려하는 시기가 오는 것 같다. 그때부터 고민하면서 소설 창작에 변화를 주면 된다. 어두컴컴한 바다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면 어디로 헤엄칠지 둘러보고 다시금 나아가면 된다. 내가 정한 방향이나 그 끝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다는 한없이 광활하다. 언제든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다.


 

 

호흡법을 알아야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듯



소설을 쓰려고 노트북이나 공책을 펼치면 턱 막히는 지점이 바로 ‘기본’이다. 흔히들 말하는 플롯이나 소설의 3요소라고 불리는 인물, 사건, 배경을 모르는 상태라면 백지를 빼곡하게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과 두려움이 느껴질 터다. 나 역시 그랬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있는데 기본을 모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쓰고 표현해야 하는지 그 정도를 감각할 수 없어 답답했다. 


나는 문예창작학과 실기 준비 기간이 짧아서 더욱 그랬다. 단기간의 수업과 한 장짜리 콩트 쓰기 연습만으로는 단편소설 쓸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지만 짧은 실기 준비는 동시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이만큼만 해도 합격했는데 이론 수업은 집중해서 들을 필요 없겠지, 이미 대강 아는 건데 또 들어서 뭐해. 그때 제대로 수업을 듣지 않은 걸 나중에서야 후회했다. 


기본을 몰라도 소설을 쓸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동의한다. 기본 그따위 것 몰라도 소설은 쓸 수 있고, 애초에 그런 틀에 갇힌 것만이 소설은 아니다. 요즘은 시와 소설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기존의 소설 문법을 파괴하는 작품이 여럿 등장하고 있다. 나중에는 예술의 경계들이 모조리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본과 경계는 중요하다. 기본을 알아야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욱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헤엄칠 때 개헤엄이나 개구리헤엄으로도 수영할 수 있다. 그렇게 해도 앞으로 잘 나아간다. 그러나 자유형이 가장 안정적이고 안전하며 여러모로 효과적인 수영 방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뭘 쓰든 써 놓고 내가 소설이라 칭하면 그것은 소설이 되겠지만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잘 담았느냐는 장담할 수 없다. 이만큼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소설인데 본래 매력의 반의반도 보여주지 못하면 아쉽다. 기본은 그런 지점을 해결해 준다.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뚜렷하게 보이게끔 한다. 


기본을 대충 공부했을 때에는 어느 소설을 써도 무언가 하나씩 빠진 느낌이었고, 그렇다는 평을 자주 받았다. 등장인물이 살아 있지 않은 종이 인형 같아요. 사건과 변화가 없어요. 그냥 그저 흘러가는 소설 같아요. 소설 속 메시지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고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만 언급되니 꽤 억울했다. 그래서 휴학한 지금, 클래스를 세 개 정도 들었다. 기성 작가분들이 진행한 소설 창작 클래스였는데 소설 문법에 대해 충분히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문법을 대입하고 기본에 맞춰서 글을 쓰니 그제야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라고 해도 모든 예술은 여전히 각자의 기본과 문법이 밑바탕 되고 있다. 소설 또한 그렇다. 경계의 파괴라느니 새로운 창작 기법이라느니 그런 것들은 우선 기본부터 할 줄 알아야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지 않을까, 하고 조금 세게 이야기해 본다.

 

수영 강습 첫 수업을 들으러 가면 호흡법부터 배운다. 숨을 최대한 들이마신 뒤 물속으로 들어가서 음, 소리를 내며 코로 호흡을 뱉어낸다. 물속에서 호흡할 줄 알아야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바다로 향할 수 있다. 


 

 

가만히 있어도 둥둥 뜬 채 흘러갈 수 있으니까


 

소설을 쓰는 순간마다 의아했다. 왜 내가 소설을 쓰고 싶어 하지?

 

소설이 끝없이 나를 끌어당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기보다 소설이 나를 창작 대상으로 지정한 느낌까지 든다. 벗어날 수 없지만 굳이 벗어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중독의 일종 같기도 하다. 소설을 쓰는 이유는 각자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공통점이 있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 즉 ‘발언’이다.


학과 동기들과 직장인, 주부 등 소설 쓰는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그들 모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독자에게 전달까지는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설에 담는 것만으로도 창작의 원동력을 얻고, 누군가는 소설을 통해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나 같은 경우 ‘살아가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 소설 창작이 필연이라는 느낌, 소설이 날 끌어당기는 듯한 기분. 한마디로 정리하면 소설을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라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다. 나는 소설에 사회 문제를 다룬다거나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크게 없는 편이다. 그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쓰고, 만들고 싶은 인물이 생기면 만든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기면 그걸 토대로 쓰거나 어느 날은 번개 맞은 듯 번뜩 떠오른 사건을 후루룩 써 내려가기도 한다.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 새로운 소재를 찾기 위해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영감을 얻기 위해 전시회를 다니고, 더욱 높은 창작 완성도를 위해 다른 작품을 계속해서 읽는다. 전부 내 소설을 위한 일. 살아가기 위한 일이다. 그런 경험을 모아 소설을 쓰고 있노라면 깊지만 투명한 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소설이 잘 써지는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슬럼프가 오면 한 자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공포감이 나를 장악한다. 다만 나는 소설에 대한 기묘한 믿음이 있다. 가만히 있어도 둥둥 뜬 채 흘러갈 수 있는 바다처럼. 지금 잠시 소설을 쓰다 말 게 아니니까. 남은 생 전부를 소설에 바칠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잠시 찾아온 슬럼프가 아주 작은 점처럼 느껴진다. 잠잠하든 파도가 몰아치든 바다는 바다다. 나의 소설은 나의 소설, 나의 삶은 나의 삶이다. 나는 소설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바다처럼


 

쓰는 것만큼 읽는 게 재밌고, 읽는 것만큼 쓰는 게 재밌다. 그래도 나는 쓰는 게 조금 더 재밌다. 이 세상에 없는 유일무이한 이야기를 매번 써낸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댄다. 

 

소설을 써보고 싶은데 망설여지거나 소설 창작은 어려운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한 장짜리 소설이든 세 장짜리 소설이든 다 괜찮으니 일단 공책을 펼쳐보길 바란다. 노트북을 열어 첫 문장을 써보길 바란다. 소설은 넓고 문학은 광활하다. 누구든 헤엄칠 수 있게 해주고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파도가 일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다. 

 

바다처럼 말이다.

 

 

[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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