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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고전은 누구의 슬픔을 기억하는가 - 로테/운수 [공연]

연극 <로테/운수>가 돌려준 여자들의 이름

by 채수빈 에디터
2026.06.08 15:45

 

 

대학교 때 들었던 교양 수업 중 아직도 기억하는 수업이 있다. 〈문학 속의 여성들〉이라는 제목의 이 수업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오필리아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고, <안나 카레니나> 속 여성 인물들의 선택을 새롭게 분석하게 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읽어온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 왔는지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많은 여성들은 언제나 누군가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누군가의 비극을 완성하기 위해 호출되는 인물들로 그려졌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작품들에는 그런 여성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이름은 알지만 삶은 모르는 인물들. 혹은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
   
극단 하이카라의 연극 〈로테/운수〉는 그렇게 지나쳐온 여성 두 명을 무대 위로 소환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서 탄생한 두 작품들이지만 모두 남성 인물의 비극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했던 여성들을 서사의 중심으로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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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로테〉의 주인공은 낙성대학교 미술사학과 부교수 ‘김로테’다. 젊은 나이에 교수로 임용되고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있는 성공한 여성의 모습이다. 극은 그런 그녀가 정신과 상담실을 찾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망상장애 진단을 받은 그녀의 삶은 이미 무너져 있다. 집 앞에 놓여 있던 한 송이 장미꽃은 처음에는 사소한 호감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속되는 원치 않은 구애는 점차 그녀의 일상을 잠식하는 스토킹으로 변한다.

연극을 따라가며 관객은 자연스럽게 원작을 떠올리게 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오랫동안 순수한 사랑의 상징이었다. 사회적 제약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고,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낭만적인 청년이다. 하지만 로테의 위치에 서서 이야기를 바라보는 순간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인다. 그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여성에게 지속적으로 접근하고,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상대의 의사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끝내 자신의 죽음으로 상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죄책감을 남기는 나르시시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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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원작에서 베르테르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인간 로테가 맞을까? 로테를 격렬하게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던 건 아닐까? 과연 우리는 왜 이 이야기를 순애보라고 불러왔을까. 고전은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한 청년의 슬픔은 이해하면서, 그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여성의 공포는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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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운수>는 더욱 직접적으로 고전의 맹점을 파고든다. 연극을 보기 전에도 나는 <운수 좋은 날>을 내가 읽은 소설 중 가장 미화된 소설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어린 독자였던 나는 남편이 아내의 시신을 붙잡고 울부짖은 이유를 선생님이 설명해주시기 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까지 왜 발로 차고, 폭력을 휘두른 거지? 설렁탕은 왜 사온 거지?’

물론 <운수 좋은 날>은 식민지 조선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교과서에 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주의는 김첨지의 가난과 절망을 기록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같은 공간에서 폭력을 견뎌야 했던 여성의 삶은 들여다보지 못했다.

극 〈운수〉는 이름 없던 아내에게 '이운수'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녀를 법정 한가운데 세운다. 그러나 운수는 자신의 결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거나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딘가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질문을 받아도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때로는 현실과 단절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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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운수>는 오랜 폭력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한다. <운수>는 법정극이라기보다 폭력이 한 인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주는 심리극에 가깝다. 작품 속 운수의 내면에서는 두려움과 죄책감, 분노와 체념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마치 여러 감정들이 동시에 재판정에 올라와 서로 다른 증언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단순히 "운수는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판단하는 위치에 머물 수 없다. 대신 한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폭력 속에서 자신을 지우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시간이 판단력과 기억, 자존감까지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작품이 재판대에 올려놓는 것은 운수 개인이 아니라, 그녀를 그 자리까지 몰고 온 폭력의 시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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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와 로테를 제외하면 다른 인물들은 무대 위에 오르지 않는다. 그들은 목소리 혹은 타자기 소리로만 존재한다. 로테와 운수만이 무대에 서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여기서 로테와 운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뮤즈도, 누군가의 아내도 아니다.

<로테/운수>에서는 1막이 끝나고 잠시 암전이 찾아온다. 2막이 시작될 때, 무대에는 바닥에 스프레이로 그려진 사람의 윤곽선(크라임씬 마킹)이 생겨 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로테가 결국 자살한 줄 알았다. 잠시 후 그것이 2막 〈운수〉의 시작을 위한 장치임을 알게 되었지만, 어쩌면 그 오해를 의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순한 장면 전환이 아니라 하나의 결말처럼 읽히도록 말이다. 실제로 현실에는 그렇게 끝나버린 이야기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의 힘은 인간을 이해하게 만드는 데 있다. 우리는 베르테르를 이해할 수 있고 김첨지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 어떤 고통 속에 있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고전 속 이해의 깊이가 워낙 깊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민이 따라온다. 다만 예술의 또 다른 역할은 '이해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너무 오래 한 사람의 슬픔만을 바라보고 있다.

고전이 살아 있는 이유는 시대마다 새로운 질문을 허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로테/운수>는 18세기 독일의 로테와 20세기 조선의 운수가 공유했던 고통이, 지금 여기서도 또 다른 형태로 유효하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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