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제목만 보고 들어갔다. 《사랑의 기원》이라는 이름에서 어떤 전시일지 막연하게 짐작하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안으로 들어섰는데, 예상과는 꽤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사랑을 낭만적으로 그려낸 전시가 아니었고, 기술이 삶의 조건이 된 동시대 환경 속에서 인간의 본성과 예술적 창조성이 어떻게 지속되고 변형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놓은 전시였다. 사전 정보 없이 방문한 탓에 초반 몇 작품은 방향 감각 없이 지나쳤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전시가 하려는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전시 설명을 읽는 순간 오래전에 읽었던 데카르트의 명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근대적 주체는 이성과 사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타자를 표상함으로써 스스로를 인식하는 존재로 정의되었는데,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디지털 미디어가 그 사유의 기능을 일부 대신하는 지금, 인간의 존재 방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사랑의 기원] 은 바로 그 질문을 하고 있었고, 전시는 '훔친 불꽃', '망각의 강', '낯선 귀환'이라는 세 개의 서사 단위로 나누어 기술과 신체, 기억과 보존, 그리고 체계 바깥에 남는 존재들을 각각의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발길을 멈춘 곳
첫 번째 섹션 '훔친 불꽃'에서 발길을 가장 오래 붙잡은 작품은 전혜주의 《Hummer》였는데, 초지향성 스피커를 활용한 사운드 설치로 관람객이 특정 지점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위치에 있는 표본의 소리가 들리도록 설계된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가 작품 앞에 바짝 다가서는 순간 귀를 가득 채우는 그 섬세한 소리는 짧지만 강렬한 경험이었고, 그 경험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기술이 감각을 대체하거나 압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평소에 흘려보내던 감각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직접 움직여 소리가 들리는 지점으로 다가가는 행위를 통해 기술은 신체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고 있었고, 그것이 기술과 예술이 결합했을 때 가장 긍정적인 방향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기술이 인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더 섬세하게 열어주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두 번째 섹션 '망각의 강'에서는 강우혁의 영상 작업 《왜 날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은 거죠?》가 가장 오래 남았는데, 냉동인간을 둘러싼 토론을 영상으로 담은 작품으로 관련 재단과 생명보험사, 유족 등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냉동 보존에 대해 논쟁하는 장면으로 구성된다. 소재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그것을 감정적인 드라마가 아닌 제도와 이해관계의 충돌 구조로 풀어낸 방식이 낯설고 신선했고, 작품을 감상하면서 섹션 입구에 적혀 있던 소개 글귀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신화 속 인물들은 망각의 강을 건넘으로써 과거를 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갔지만 현대의 우리는 기록과 저장을 통해 모든 것을 붙잡아두려 하고, 냉동인간 기술은 그 욕망의 극단에 있다는 것. 죽음조차 유예할 수 있다면 망각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이행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결함이 된다는 생각, 그리고 모든 것을 붙잡으려는 그 노력이 어쩌면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 작품을 통해 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섹션 '낯선 귀환'은 특정 작품 하나보다 섹션 입구에 적혀 있던 큐레이터의 글과 함께 기억에 남는데,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돌아온 자리는 떠났던 자리가 아닙니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섹션이 단순한 귀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 이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시스템이 아무리 촘촘해져도 끝내 담아내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낯섦은 여기서 결함이 아닙니다"라는 문장은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처럼 느껴졌고, 앞선 두 섹션이 기술과 감각, 기억과 보존의 문제를 통해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보여주었다면 '낯선 귀환'은 그 변화 속에서도 끝내 체계 안으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존재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알고리즘은 취향을 예측하고 시스템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유형화하지만, 어떤 감정은 기록되지 않고 어떤 기억은 언어화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은 끝내 기준 바깥에 남는다는 것. '낯섦은 결함이 아니다'라는 말이 특히 오래 남은 건,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인간 역시 더욱 매끄럽고 효율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는 반면 실제 인간은 늘 흔들리고 모순적이며 예측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섹션은 그 불완전함이 결함이 아닌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조건일 수 있다고 말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은 긍정적이지만 솔직하게 아쉬움도 남는다. 기술에 대한 긍정과 비판 사이의 긴장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으면 했다는 점인데, 《Hummer》처럼 기술을 감각의 매개로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작품과 냉동인간을 둘러싼 제도적 갈등을 그려낸 작품처럼 기술 발전에 내재한 권력과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작업이 공존하면서도 전시는 이 두 태도 사이의 마찰을 명시적으로 다루기보다 각 작품을 병렬로 배치하는 데 그치는 느낌이 들었다. 상반된 두 시선이 충돌하고 마찰하는 장면이 더 연출되었다면 전시가 던지는 질문이 훨씬 날카롭게 살아났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는 '사랑'이라는 제목이 만드는 기대와 실제 내용 사이의 간극인데, 나처럼 사전 정보 없이 방문한 경우 전시의 방향을 파악하기까지 초반 몇 작품은 길을 잃은 채 지나치게 되고,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인간성의 본질을 묻는 더 넓은 질문의 일부임을 처음부터 조금 더 명확히 안내했다면 관람의 깊이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기원]은 기술의 가능성과 인간성의 취약함을 같은 공간 안에 공존시키는 전시였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지향하기보다 사회적 의미를 함축하면서 개인의 내면을 건드려 사회를 향한 시선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이 지금 예술에게 요청되는 역할이라면 이 전시는 그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 잔여들을 잊지 않으려는 것. 어쩌면 그것이 기술이 점점 더 많은 것을 대신하게 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태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