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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우리가 버리지 못한, 버리지 않기로 한 것들의 모음 [도서/문학]

『은비가 버리지 못한 것들 모음』을 읽고

by 김가영 에디터
2026.04.1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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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가 버리지 못한 것들 모음』 책의 표지

 

 

작년 가을, 새롭게 알게 된 동료가 본인이 예전에 쓴 책이라며 한 권을 소개해줬다. 살면서 모아온 것들에 관한 기록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찢겨진 수첩, 글씨가 잘 써진 메모, 초콜릿 껍질 등 누군가 보기엔 어처구니없겠지만 나름의 사연으로 버리지 못한 기억들이라고.

 

그 얘길 듣는 순간 반가웠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싶은 신선한 충격도 함께였다. 나에게도 버리지 못한, 버리지 못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보고 있으면 그 안에 얽힌 장면들이 따라오는 듯하다. 그럴 리 없는데 버리면 기억이 사라질 것 같아서, 잊기 싫은 시간을 봉인해두듯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다. 그녀는 과연 어떤 것에 마음이 붙들렸을까. 얼른 그 책을 읽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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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가 버리지 못한 것들 모음』 책의 목차. 어떤 것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무엇을 소중하다고 여기는지, 어떤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았는지 모든 물건들이 대신해 말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물건은 총 네 개 카테고리로 나뉜다. 순간을 떠올릴 수 있는 장치, 명함으로 기억하는 사람과 하루, 기념품적 요소 혹은 심미적인 이유, 아끼다 똥됐거나 숨겨야 했던 것. 그렇게 수십 개의 물건 하나하나에 어떤 마음이 통했는지, 지님으로써 무엇이 남았는지가 담겨있다. 그렇다 보니 책을 읽는 것만으로 함께 여러 상황을 겪고,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과한 것처럼 그녀의 여러 층위를 흡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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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1_ '아빠가 만든 윷놀이판' 중

 

 

물건은 사진이나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을 저장한다. 후자가 어떠한 장면을 붙잡는다면 전자는 감각을 붙잡는다. 좀더 또렷하게, 더 입체적으로 우릴 그날로 데려다 준다. 구겨진 버스 티켓 한 장이 여행을 시작하던 설렘을, 창밖 풍경을, 함께 듣던 노래를 일순간 불러온다. 다른 방법으론 재현되지 않는 것들이 그 안에 새겨져 있다.

 

작가노트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장 강박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영원한 건 없다는 것도 알지만 이보다는 좀더 지속될 거라 생각했던 관계들을 추억이라 생각하며 자꾸 남겨 놓는 것 같다고. 그래서 계속 욕심 많게 살고 있다며. 그 말에 나 역시 공감했다. 버리지 않기로 마음 먹어서 후회하기보다는 다행이라 여긴 순간들이 더 많았으니까. 끝인 줄 알았던 순간에 쉼표를 주면, 얼마간 흐른 뒤 다시 이어지는 일이 있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관계가 무사히 지나왔음에 안도하기도 하고 영영 끝이더라도 어떤 형태이든 마음에 남아 다른 시작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모든 것들은 잊고 싶지 않아도 잊혀진다. 평생 기억하고 싶은 행복한 순간들도 나에게 죽으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충격적인 사건들도. 결국 지금 이 순간의 일이 아니라면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 내가 이 표를 버리지 않았다고 해서 이걸 받았던 그 하루가 통째로 기억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버리지 않는 건, 그 잊혀진 하루를 어떠한 형태든 물질로나마 남겨놓고 싶은 걸까.

 

— 『은비가 버리지 못한 것들 모음』 중에서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고 있는 요즘 굳이 손에 잡히는 것들을 붙드는 일은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진을 보는 것과 물건을 손에 쥐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나의 경우 디지털이 기억들을 간편하게 보존해주었다면 어떤 물건들은 되살렸다. 서랍 깊숙이, 혹은 보물 상자 안에 존재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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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잡지사에 막 입사했을 무렵 선배가 빨간펜으로 첨삭해준 초고다. 문장 하나하나에 빼곡히 적힌 메모들. 꺼낼 때마다 매번 느낀 감정이 달랐다. 처음엔 부끄러웠고 다음엔 고마웠고 이후 선배의 연차를 훌쩍 넘기고서야 알았다. 당연한 게 아닌 책임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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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처음으로 기획 지면을 구상하며 썼던 메모들이다. 알아보기 힘든 글씨에 온갖 도형과 숫자가 뒤엉켜 있다. 그때의 막막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메모에서 시작해 결과를 이루었다는 것이 새삼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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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2023년 친구와 다녀온 다낭행 비행기표다. 여러 여행을 다녔지만 이 여행만큼은 어느 순간 하나 흐릿하지 않고 행복했다. 그 순간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데 버팀목이 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러고보니 버리지 못하는 마음은 잊혀지는 것들에 저항하는 방식이겠다. 이 책 속에 기록된 물건들, 그것들에 얽힌 이야기들은 결국 기억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사라지는 무언갈 붙잡으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몸짓. 그녀가 먼저 그 마음에 이름을 붙여줬다. 그 덕에 나의 보물상자도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앞으로 또 어떤 것들이 쌓이게 될까. 버리지 못할 아니 버리지 않기로 할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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