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시작하면서
정용준 작가의 「선릉 산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10분 정도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작품 생각 없이 오로지 지난 삶을 떠올렸다. 그리고 ‘과연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노력했는가’와 ‘열두 시간 동안 변화하거나 누군가를 변화시킨 적이 있었는가’라는 두 문장에 물음표를 남겼다. 아직 마침표를 남기지 못했다.
소설의 그들처럼 “어딘가로 가야 하”(73p)는 상황에 놓였다. 산책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을 말한다. 어디로 산책을 가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일단 길을 나서는 수밖에.
소설이 보여주는 시간은 단 열두 시간, 짧은가 긴가.
소설은 “은색 세단이 약속 장소인 선릉역 근처 카페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아홉시였다.”(71p)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독자는 첫 문장에서 소설의 공간과 시간을 모두 알게 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1인칭 시점으로 볼 때만 보여줄 수 있는 속마음이 드러난다. “뭔가 분명하고 단호하고 에누리 없는 하루”(71p)가 되리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나’의 속마음은 소설의 전반에 깔려 있다. 시점인물 ‘나’가 생각한 첫 장에서의 하루는 마지막 장까지 연결된다. 그는 “이상한 하루였다.”(108p)라며 열두 시간을 회상한다.
하지만 오전 아홉 시의 생각과 오후 아홉 시의 생각은 완전히 뒤바뀐다. ‘나’와 독자에겐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이, 무엇이 가짜고 진짜인지 모른 채 ‘모르겠다’라고 되뇔 수밖에 없다.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자. 인물의 외형과 행동을 세밀한 묘사로 채운다. 그리고 다치지 않도록 해달라는 유일한 요구가 깨지리라는, 어떠한 사건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게 만들 것이라는 의심과 불안이 시작된다.
소설에는 행동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앞서 말했듯이 「선릉 산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렇기에 거리가 없는 만큼 거침없이 독자를 손쉬운 이해와 화해로부터 멀리 차버린다. 소설에 나오는 ‘나’의 혼잣말 전부에 형광펜을 그었다. 두운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84p에서 “그는 어떤 사람일까”라고 생각하는 ‘나’의 말엔 형광펜을 두 번 그었다. 과연 내가 그를 정의 내릴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결코, 그리고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메모를 그 옆에 적었다.
1인칭 시점이기에 독자는 결말에서 ‘나’의 감정 변화와 “희미한 수치심”(99p)에 공감할 수 있다. 계속해서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의 대사를 독자도 입으로 뱉게 되는 것이다.
「선릉 산책」에선 두 명의 중심인물과 두 명의 보조 인물이 있다. 중심인물은 하루만 알바를 맡게 된 ‘나’와 자폐성향의 스무 살 ‘한두운’이다. ‘나’는 “유연함과 융통성이 부족한”(80p) 사람으로 어떻게 보면 정해진 규칙을 좋아한다고 보인다. 그래서 우진 형이 준 쪽지의 5가지 유의사항을 모두 지킨다.
두운은 ‘시가에서 구나 행의 첫머리에 규칙적으로 같은 운의 글자를 다는 일이나 그 운’을 의미한다. 두운은 침을 뱉는 습관이 있으며 달팽이 더듬이처럼 몸을 위축시키기도 하고 나무 이름을 외우는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보조 인물은 끝내 두운에게 걸음을 맞춰주지 않는 여자와 원래 알바하던 우진이다. 여자는 두운의 이모로 장애인 보호자의 삶에 지친 듯 보인다. 세 시간이나 늦게 왔으면서 오히려 화를 낸다. 그녀는 두운을 앞에 두고도 그의 탓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독자는 무조건 여자를 비난할 수 없다. 시점인물인 ‘나’처럼 조용히 해달라는 동시에 미안하다고 말하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과 마주한다. 그게 현실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언제나 모두에게 타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절대적인 보호자로 역할하는 일은 경험해 보지 않고선 이해할 수 없다. 단 열두 시간만 두운을 본 ‘나’와 아마 그것보다 짧은 시간 동안 그를 이해하려고 한 독자까지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아를 되돌아보며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생기기도 한다. 우진의 대사는 정말 주옥같다. “대충해. 날도 더운데.”(88p)라며 말하는 그, 심지어 전화 상황으로 보아 여자와 놀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 인물이 움직이는 공간과 지닌 것에 관하여
소설은 선릉역과 선정릉을 중심으로 산책하면서 진행되며 일식집과 놀이터 같은 갈등이 생기는 공간까지 잘 구성되어 있다. 오피니언 제목에서부터 강조하고 있는 열두 시간은 소설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시점인물인 ‘나’는 한두운을 만나기 전부터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한다. 총 8번 시간을 말하고 처음에는 어서 빨리 여섯 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이 몇 시인지보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를 확인한다.
그러나 소설의 시간은 85p의 “모르겠다. 네 시간 남았다.”라는 순간을 기점으로 변화한다. ‘나’는 두운의 권투를 보고 그를 억압하던 헤드기어와 가방을 넘겨받는다. 그리고 복싱했던 과거 이야기를 꺼낸다. 더 이상 남은 시간을 세지 않는다.
심지어 마지막엔 “집에 걸어가면서 한두운 생각을 좀 했다.”라는 문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냥 생각한 것도 아니고 좀 했다, 라는 섬세한 묘사에서 정용준 작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소설이 가진 상징을 말하고 싶다. 두운이 지닌 물건은 “머리에 쓴 헤드기어와 무거워 보이는 보라색 백팩”(73p)이다. 이는 두운이 산책하기 위해선 반드시 지녀야 하는 물건이다. ‘나’는 장애인 화장실에서 그 물건을 걸쳐 맨다. 이로써 결말에서 두 물건을 잃어버리는 복선이 시작된다.
또한,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두운의 짐을 넘겨 받으면서 조금은 그의 삶에 공감하게 되는 모습이 아닐지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 발화되는 ‘파피용’(92p와 107p) 역시 주목해야 한다. ‘나’의 입에서 한 번, 두운의 입에서 한 번. 나비이자 나방이라는 의미의 프랑스 단어.
소설을 읽으며 나비의 날갯짓과 두운의 걸음걸이가 겹쳐 보였다. 두운은 바람의 맛에 황홀감을 느끼고 그는 소설에서 나비처럼 움직인다. 나비는 새와 달리 스스로 땅 위에서 떠오를 수 없다. 바람을 타야 하며 바람결에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바람의 맛을 안다. 한두운이 황홀한 표정으로 바람의 맛을 보는 순간, 독자가 사는 세상에도 그 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하게 된다. 이제 작가가 묘사한 춤추는 그의 걸음처럼 춤추듯 바람을 타고 날아가면 된다. 진정으로 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산책을 끝내면서
개인적으로 선릉을 산책하는 그들을 보면서 소설 밖의 나는 암흑을 끊임없이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내가 만났을 수도 있는 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지난여름 자폐 학생과 일주일에 하루, 그중 세 시간을 함께 지냈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는 짧게 지나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지만, 유독 내겐 큰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시점인물인 ‘나’와 한두운의 산책이 나와 그 학생으로 겹치는 듯했다.
자폐성향의 사람은 누군가와 걸음을 맞춰서 함께 걷기가 어렵다. 나 역시 항상 쫓아가는 걸음으로 따라갔고 계속해서 같이 가자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소설 속 “나는 한두운과 나란히 걸었다.”(93p)는 문장을 듣자마자 슬며시 기분이 좋았다. 그렇다. 아, 이날의 산책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동행하는 순간이 되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