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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광화문에 있는 예술영화관 씨네큐브가 개관 25주년을 맞았다. 25년 동안 한 자리에서 예술영화를 상영해 온 극장. 그 시간을 기념해 세 명의 감독이 모였다. 이종필, 윤가은, 장건재. 서로 다른 결을 가진 세 감독이 ‘극장’이라는 공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앤솔로지 영화가 〈극장의 시간들〉이다.
영화는 영사실에서 시작한다. 기존 직원이 새로 온 직원에게 일을 알려주고, 필름을 감는 장면이 이어진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디지털이 익숙한 시대에 오히려 물리적인 감각이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극장은 그렇게 또 하루의 상영을 준비한다.
<침팬지> - 감독: 이종필 / 출연: 김대명, 원슈타인, 이수경, 홍사빈
〈침팬지〉는 2000년대 광화문 씨네큐브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팝콘을 먹는 친구를 보며 영화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고 말하던 사람은 정작 예술영화를 보며 잠들고, 팝콘을 먹던 친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영화를 본다. 예술영화를 자주 보던 두 친구는 영화관에서 자주 마주치던,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던 사람과 친해지고 셋은 늘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들은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실제로 동물원에 침팬지를 보러 가고, 아무 이유 없이 음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춘다. 핀란드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던 세 마리의 침팬지 중 결국 한 마리만 남았고, 창경궁 동물원에서 울부짖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그들의 시간 속에 자리 잡는다. 우리는 한 편의 청춘 영화처럼 그 시간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 영화는 현재로 전환된다. 영화 개봉을 앞둔 감독의 인터뷰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친구들과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 순간 비로소 알게 된다. 방금까지 우리가 보고 있던 세 친구의 이야기가 바로 이 감독이 만든 ‘영화 속 영화’였다는 것을. 과거의 기억이 스크린 위에서 한 편의 작품으로 재현된 셈이다.
개봉 후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한 반응을 검색해 본다. 하지만 신랄한 인터넷 평론 앞에서 그는 쉽게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 침팬지 책을 읽었던 헌책방을 찾고 그때 그 책을 읽어보지만, 자신이 기억하던 문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는 침팬지의 안부를 궁금해 한다. 정말 ‘침팬지’의 안부가 궁금한걸까. 어쩌면 그건 침팬지가 아니라 그때 그 시간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의 안부, 그리고 아무 계산 없이 영화를 보러 다니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리운 것 아닐까.
우리의 기억은 그 순간을 정확하게 담기보단 늘 조금씩 달라진 채로 남는다. 세 친구가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실제로 동물원에 침팬지를 보러 가고, 아무 이유 없이 함께 춤을 췄던 시간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분명 그들을 조금씩 자라게 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떤 영화를 봤는지보다 누구와 봤는지가 더 또렷하게 남는 기억처럼. 영화는 그들을 성장하게 했고, 친구들과 함께 보았기 때문에 더 깊이 남았다. 감독이 되어 그 시간을 영화로 다시 만들었지만, 정작 그를 자라게 한 건 영화를 ‘만드는’ 순간이 아니라 영화를 ‘보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침팬지〉는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함께 보던 관객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기억은 완전히 재현되지 않지만, 함께 극장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던 그 시간만큼은 각자의 안에 남아 있고, 어쩌면 그 시간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 감독: 윤가은 / 출연: 고아성
〈자연스럽게〉는 아이들이 자연을 구경하며 쉴 새 없이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없이 즉흥적이고 꾸밈없어 보이는 그 장면 뒤에는 촬영 현장이 있다. 감독은 배우들에게 연기를 하듯이 말하지 말고, 정말 일상을 찍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영화는 최종적으로 들어갈 장면뿐 아니라 촬영 현장에서 오가는 대화들까지 그대로 들려준다. <자연스럽게>라는 제목처럼 러닝타임 내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숨기지 않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아역배우들의 대사인 “대체 뭐가 부자연스럽다는 거지?”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걸까. 나는 연기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연출을 배운 적도 없는 그저 관람객 1도 아닌 99쯤 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몰입이다. 등장인물의 감정이 나와 맞닿는 순간, 혹은 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며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순간. 그때 나는 스크린 속 세계를 믿게 된다.
영화는 결국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카메라가 있고, 대사가 있고, 반복이 있었을 장면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그 감정이 동화가 되는 순간이 들면 그건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연기가 아니게 된다. 하지만 그 믿음이 깨지는 건 인물이 ‘연기하고 있다’라는 감각이 먼저 보일 때다. 그래서 자연스러움은 단순한 연기의 문제가 아니라, 관객이 그 세계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처럼 느껴졌다. 윤가은 감독은 아이들의 세계를 통해 그 말을 건넨다. 어쩌면 자연스럽다는 건 완벽해 보이는 상태라기보다, 진심에 가까워 보이는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영화의 시간> - 감독: 장건재 / 출연: 양말복, 장혜진, 김연교, 권해효, 이주원, 문상훈
〈영화의 시간〉은 영화의 가장 처음에 크레딧을 보여준다. 나레이션으로 제작진과 출연진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준다. 우리는 보통 영화가 끝나면 자리를 정리하지만, 이 영화는 이름들로부터 시작한다. 스크린 위에 적힌 이름들이 천천히 불릴 때, 그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시간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티켓 발권을 도와주는 직원, 미화를 담당하는 직원, 영사기를 돌리는 직원. 우리는 스크린을 보러 극장에 가지만, 사실 극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겹쳐 만들어진 공간이다. 영화는 그 겹친 순간들을 천천히 비춘다.
영화관 미화를 담당하는 ‘우연’의 친구 ‘영화’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광화문을 걷다가 씨네큐브에 들어오고, 오랜 친구 ‘우연’을 다시 만난다. 우연의 제안으로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게 되고, 그 시간은 마치 한여름의 작은 일탈처럼 그려진다. 영화를 보던 중 영화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편안하게 낮잠에 빠지고, 그 사이 꿈을 꾼다. 갑작스럽게 내린 소나기에 사람들이 비를 피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잠시 멈췄다. 영화는 정말 우연처럼 찾아와 삶의 비를 잠시 피하게 해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에피소드는 관객과 영화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극장이 서로 다른 시간들이 겹쳐지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전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공통으로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세 감독이 영화와 극장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극장을 향한 하나의 러브레터 같았다.
요즘 전 세계 영화제 시상식을 보면 배우, 감독, 작가들이 극장을 많이 찾아달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는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자주 가는 편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은 확실히 줄었다. 그에 따라 무인 발권기로 표를 끊고 자율 입장을 하는 영화관이 대부분이고, 보고 싶은 영화는 개봉 주에 보러 가지 않으면 금세 내려간다. OTT 서비스가 늘어나면서 굳이 영화관을 찾지 않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시대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긴 시간을 어떤 공간에 찾아가 방해 없이 하나의 예술을 바라본다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공간에 모인 사람들과 암묵적인 규칙을 지키며 같은 장면을 바라보고, 같은 순간에 웃고 울고 숨을 고르는 경험은 가보지 못한 어느 곳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상영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며 평소에는 잘 보지 않던 영사기 쪽을 올려다보았다. 인트로에서 기사 님이 필름을 감던 그 자리였다. 그곳에 실제 영화속 기사님이 그대로 서 계셨다. 방금까지 스크린 속에서 보았던 장면이 현실과 겹치는 순간이었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잠시 모호해지는 느낌이 새롭고 신기했다. 영화는 끝났지만, 극장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극장의 시간들〉을 보며 내가 왜 영화를 좋아했는지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함께 영화를 보러 다니던 친구들은 지금 잘 지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 영화는 극장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에게 극장은 어떤 곳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