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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센 날은 창문이 덜컹거린다. 천둥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눈앞이 번쩍이며 번개가 친다. 아주 어렸을 적 가족들과 섬 쪽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텐트를 치고 잠을 잤었다. 텐트 속으로 폭우가 바다처럼 덮치듯이 텐트 속을 장악했었다. 무서움도 잠시, 폭우를 피하고 몸을 따뜻하게 말린 후 다 같이 컵라면을 먹었는데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의 맛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비 때문에 새벽에 텐트도 다 젖고, 라면도 먹고. 여행을 망쳤다기 보다 하나의 추억이 생긴 셈이다. 사람들은 비가 오면 대게 센치해지고, 축 처지고, 불편하다고 푸념한다. 비가 오는 게 싫으면 잠시 비를 피하면 된다. 집에서 김치전을 부쳐먹어도 되고, 넷플릭스에서 하는 재밌는 드라마를 하루 종일 보다 보면 비가 그친다.

 

허나영 작가의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흔들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림을 두고 자세히 분석하는 그림책이 아니다. 그림을 통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록에 가깝다. 유명한 화가와 명작에 대해서는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문제로 많이 접했다. 이후에도 미술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는데 ‘다 아는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허나영 작가의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새롭게 다가왔다.

 

저자는 그림이 자신의 삶과 어디에서 맞닿았는지 무엇이 자신을 위로했는지 조용히 꺼내놓는다. 이 책을 읽는 느낌은 미술관 도슨트 설명을 듣는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기장을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저자는 그림을 분석하기보다, 그 안에 자신을 비춘다. 어떤 날의 불안, 어떤 시절의 상실, 스스로에게조차 설명하기 어려웠던 감정들을 그림 위에 겹쳐 놓는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작품을 ‘이해’하기보다 그림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삶을 따라 걷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길은 자연스럽게 내 삶과도 포개어진다.

 


 

견뎌낼 수 있는 힘

되고 싶은 내가 아니라 존재하는 나다


 

저자가 소개하는 미술작품들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었다. 방법과 모양은 다르지만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결국은 빛날 수밖에 없었던 ‘보이지 않는 힘’이다. 저자는 어릴 적 입신양명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는데 하다 보니 예상한 곳과 다른 곳에 있었다. 신기루만 쫓는 느낌이 들어서 목표에 대해 다시 생각 해보았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담과 함께 에두아르 마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이야 마네의 작품은 명작으로 손꼽히지만 마네는 살롱전에서 떨어진 낙선전에서 최악의 작품을 주목을 받았다. 외설 작품이라는 평가는 큰 상처로 남았다. 낙선전에 그림이 걸려 그리는 일을 멈췄을 법도 한데 매년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빛의 화가라는 수식어로 잘 알려진 작가 모네는 어떠한가. 그는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빛을 끝까지 붙들었다. 인상주의가 조롱 받던 시절에도 “이것이 내가 보는 세상”이라고 말하듯 자신의 화풍을 밀어붙였다. 화가라는 자부심과 자신감, 가족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결국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존감이 생긴다는 사실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책의 문장 중 한 구절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멈칫했다. 나는 얼마나 자주 나를 의심하며 방향을 틀어왔던가. 남들의 시선과 결과의 속도에 흔들리며 내가 보고 싶은 빛을 놓쳐버리진 않았는지 되돌아봤다. 그러니 모네의 그림이 아름다운 이유는 풍경이 예뻐서만은 아닐 것이다. 끝까지 자신을 믿은 한 인간의 시간이 겹쳐 있기 때문은 아닐까.

 

모네에게서 배운 건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내가 보는 색을 믿는 일”이었다.

 

 

 

그림 너머에 숨어있는 조용한 울림


 

많은 화가들의 당대의 배경과 상황 이야기들은 ‘그래서 이럴 수밖에 없었구나’라고 나를 납득 시킨다. 이 책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삶을 조명하고, 그들이 가졌던 삶의 태도를 통해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이며 용기다. 외부의 평가보다 내가 느끼는 감각을 신뢰했던 모네의 자신감처럼 말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 책 제목이 말해주는 건 무엇일까를 생각 해봤다. ‘숨는다’는 것은 도망이 아니라 선택일 것이다. 세상의 소음이 거셀 때 잠시 그림 앞에 서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나를 비추고 나답게 살아갈 힘을 얻는 일이다. 그 조용한 힘을 알려주는 책이어서 좋았다. 예술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우리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오늘은 멀리서 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여봐야겠다. 저 멀리서 봄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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