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연하게 이어지지 않는 조합이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노란색 체리, 분홍색 코끼리,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것들.
나에게 카지노 베이비는 그런 조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고, 말이 안 되기에 흥미로웠다. 그렇다고 단순히 그런 이유로 책을 고른 것만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번쩍이는 전광판과 분수, 끝없이 이어지는 붉고 검은 바닥과 벽, 표정이 읽히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맞다, 카지노다. 삐에로가 빨간 입을 귀까지 끌어올려 웃는 듯한 공간. 밝지만 그 밝음이 기괴하게 느껴지는 장소였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고,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지만, 마카오 여행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카지노였다. 모두에게 오라고 소리치는듯 하지만 경계선이 그어져 있어 닿을 수 없는 곳. 그렇기에 더 궁금해지는 장소. 그런 곳에 아이라니, 독립서점에 들어선 나는 홀린 듯 이 책에 손을 뻗었다.
〈카지노 베이비〉
〈카지노 베이비〉는 강성봉의 장편소설로, 제2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작품은 1부 〈전당포 가족〉, 2부 〈카지노 베이비〉, 3부 〈할머니의 유산〉으로 구성되었으며, 화자는 열 살 정도의 '카지노 베이비' 하늘이다. 이야기는 아이인 하늘의 시점으로 흘러간다.
아빠는 나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렸다.
소설은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안쓰러운 아이라는 시선을 차단하려는 듯, 혹은 애써 강한 척을 하려는 듯 하늘은 곧바로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길. 버림받은 아이의 이야기라고 우울하게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
하늘의 가족은 네 명이다. 엄마, 삼촌, 할머니, 그리고 하늘. 엄마는 도서관 공공근로자, 삼촌은 백수다. 두 사람이 벌어들이는 돈은 한 달에 백 만원 남짓, 이 가족은 결국 할머니의 전당포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하늘이는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 어른들은 그런 하늘이에게 계속해서 곤란한 질문을 던지지만, 엄마는 그 질문들이 자신과 하늘을 떼어놓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당포 거리에는 전당포가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지만, 할머니의 전당포만은 꾸준히 잘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건너편의 스피드전당포의 용 사장은 가짜 노조 위원장의 아들로, 할머니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그러나 엄마는 용 사장과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밤, 하늘은 할머니 몰래 용 사장과 통화하던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과거 '랜드'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엄마가 도박꾼 여자의 부탁으로 잠시 아이를 맡았고, 그 여자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어느 날, 하늘은 어렴풋이 한 기억을 떠올린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흥겨운 음악에 물줄기를 뿜는 분수대, 그 가운데 반짝이는 LAND라는 글자. 아빠의 손을 잡으려던 손은 허공을 가르고, 어디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흐릿한 기억. 하늘은 카지노를 가봐야겠다고 결심한다.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서다.
카지노 베이비, 그리고 성숙한 아이
'카지노 베이비'만큼 유연하게 어우러지지 않는 조합이 하나 더 있다. '성숙한 아이'다. 나는 성숙한 아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아이는 스스로 성숙해진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기를 강요받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럴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했다는 뜻이다.
하늘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별칭을 가진 아이다. 안타깝게도 성숙해질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아왔기에.
지음 사람들이 못 본 척하는 건 삼촌만이 아니다. 엄마를 봐도 못 본 척한다. 멀리서는 실실 웃다가도 엄마가 다가가면 표정이 싹 바뀐다.
- 16p
나는 안다. 나처럼 비밀 많은 아이를 세상에서 뭐라고 부르는지. 바로 그림자 아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단 뜻이다.
그림자 속에 앉아 세상을 내다보면 어른들 이마에 새겨진 작고 검은 흉터가 보인다. 흉터는 엄마도 있고, 삼촌도 있고, 할머니도 있다. 동네 사람들도 다 하나씩 갖고 있다. 그 흉터를 읽는 게 나의 일이다. 이상하단 생각은 감히 할 수도 없다. 내가 어른들이 이상하다고 하지 않는 건 어른들도 날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으면 해서다.
- 27p
지음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다. 정확히는 지음의 옆, 슬립시티라고 불리는 전당포 거리와 불빛이 번쩍이는 랜드가 그렇다. 할머니의 전당포가 잘 되는, 전당포가 망하면서도 또 다른 전당포가 그 자리에 생기는 이유는 도박을 하러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이 살고 있는 '전당포 거리'라는 공간은 그러하다. 생명의 붉음과 죽음의 붉음이 어우러지고, 그를 이용하여 돈을 벌어 살아가는 곳. 그 속에서 하늘을 이상한 아이로 취급받는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 성이 할머니의 성씨인 '동'과 같다는 이유다.
열 살의 하늘은 '동'을 붙여 자신을 동하늘이라 소개하지만, 사실 성도, 등본도 없다. '엄마'라고 불리는 엄마는 하늘을 강제로 맡게 되었기에 '엄마'라고 불릴 뿐이다. 하늘은 이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아빠의 '아' 자만 입에 올려도 인상을 찌푸리는 어른들과 엄마에 의해. 담담하게 서술해나가지만 어른들은 자신을 달갑게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일찍이 알아차리는 열 살 아이. 그것은 '성숙한 아이'나 '카지노 베이비'만큼의 비참한 조합이다. 이 역시 눈치가 또래보다 빠르다ㅡ가 아닌, 눈치가 빨라야만 하는 환경에 놓여있었다는 것이기에. 슬프게도 하늘은 말도 안 되는 조합을 모두 짊어진 아이가 되어버렸다.
붉은 판 속 푸른 주사위
정말 내가 학교에 가고 싶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거긴 그냥 아이들이 시끄럽게 재잘대는 건물일 뿐이었으니까. 맡겨진 물건처럼 조용히 전당포에 있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 29p
나는 차를 타지 않고 읍내 쪽으로 곧장 걸어내려가겠다고 말했다.
"왜?"
"학교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혼자 가도 괜찮겠어?"
"여긴 말고개재예요. 할머니 심부름하면서 몇 번이나 다녔는데요."
"하나만 약속해. 밥 먹기 전엔 집에 올 거지?"
"그럼요!"
나는 크게 대답했다. 어찌나 컸는지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말고개재를 울렸다. 오래전부터 엄마가 그렇게 물어보길 기다렸다. 그렇게 묻기만 하면 난 아주 기분 좋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엄마를 알기 전부터 그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 293p
하늘에게 남긴 할머니의 유산은, 다름 아닌 학교에 갈 수 있는 서류다. 소설 초반, 하늘은 학교에 딱히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막상 학교에 갈 수 있다는 확답을 받자 설레어하며 홀로 학교를 향해 달려간다. 사실 하늘은 그 누구보다도 학교에 가고 싶은 아이였다. 홀로 가보고 싶다는 말이 담긴 페이지 속에서, 하늘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 말하는 '붉은 판'은 지음, 혹은 불특정한 세계를 이야기한다. 붉은 판에는 붉은 주사위가 어울릴 것 같지만,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때로는 노란색이나 푸른색의 주사위가 굴러들어갈지도 모르고. 넓게 판을 깔아보자. 어찌 되었든 판은 붉은색으로, 주사위 색은 각가지, 뽑자면 푸른 주사위로.
소설 속의 하늘이라는 푸른 주사위는 붉은 판에 굴려졌다. 버려질지도 몰랐던 하늘은 엄마를 만나고, 삼촌을 만나고, 할머니를 만난다. 주변의 어른들은 붉어도 너무 붉어서, 푸른 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하늘은 그 판 위에서 꿋꿋이 구른다. 그렇게 수없이 던져지던 푸른 주사위는 어느 날 육을 맞이한다. 수많은 푸른 주사위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사실은 세상에 붉은 판과 푸른 주사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줄 수 있는 곳을 만나며.
주사위가 육이 떴다고 영원히 육일 수는 없다. 판은 여전히 굴러가고, 우리는 또 다시 주사위를 던져야만 한다. 도박판은 그렇게 흘러가니까.
작가는 전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하늘이라는 아이와 더불어 지음이라는 땅이라고. 지음은 꺾이고 파헤쳐지며, 팔리고 빼앗기고, 무언가를 지었다가 허물어뜨리기도, 다시 또 짓고 허물어뜨리기도 한다. 두 주인공의 공통점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색의 판을 밟더라도, 다음 주사위가 어떤 눈을 보여주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