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학원에 가려고 명동역에서 지하철 카드를 찍었을 때 역무원에게 제지당한 적이 있었다. 역무원이 물었다. 왜 청소년 카드 찍었어요? 나는 벙쪘다. 예? 16살이니까요! 당황한 내가 진땀 흘리며 해명을 하니 다행히 보내주었다. 학생 시절에 이런 적이 잦았는데, 그럴 때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오, 나 성숙해 보이는 구나' 하며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지금은 전혀 아니다. 지금은 어려보이고 싶다.) 그런데, 어쩐지 성숙하다는 말은 좋았지만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든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입시에 치이던 나는 어느 날 어른을 꿈꾸게 되었다. 그냥 어른도 아니고, 특징적인 외형을 가진 성숙한 어른. 머리는 흑발의 쇼트 커트에, 입술은 얇고 진한 레드빛, 턱 아래에는 점을 하나 찍어 놓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어른. 매번 체육복과 교복만 입는 학생이었던 나에게 그런 모습은 극도로 매력적이게 다가왔다. 어린아이가 특촬물을 보며 눈을 반짝인 채 전하는 동경어린 눈빛을 난 그녀에게 전하고 있었다. 나에게 어른을 꿈꾸게 한 그녀, 그녀의 이름은 시이나 링고다.
시이나 링고, 그녀의 이야기
시이나 링고, 본명은 시이나 유미코로 1998년에 데뷔한 일본의 여성 솔로 가수이다. 링고는 일본어로 사과를 뜻하는데, 비틀즈의 멤버인 링고 스타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 2003년까진 솔로로 활동하다, 2004년 밴드인 동경사변을 결성해 동경사변으로의 활동도 이어갔다. 데뷔는 록 장르로 시작했으나, 펑크 록, 얼터너티브 록, 알앤비, 힙합, 재즈, 엔카 등 다양한 장르를 다룬다. 직접 곡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작사와 무대연출도 담당하는데, 심지어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연출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코로나 영향으로 개폐회식 연출팀이 해산되었다.) 시이나 링고의 미적 감각을 올림픽에서 펼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달리 보면 국가에서 '인정한' 무대연출가라고 볼 수도 있다. 시이나 링고의 감각을 믿고 개폐회식 연출팀의 한 자리를 내어주었을테니.
영화 음악과 드라마 음악을 맡기도 했다. 최근에는 영화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의 주제곡을 맡았다. 그러나 '시이나 링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시이나 링고가 음악 감독을 맡은 영화 『사쿠란』이다. 사쿠란은 안노 모요코의 원작인 사쿠란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요시와라 유곽에서 살아가고 버텨가는 키요하의 이야기이다. 사실 이 영화는 추후에 개인 오피니언으로 다룰 예정이기 때문에, 깊게 이야기하진 않겠다. 아무래도 시이나 링고 본인이 〈가부키초의 여왕〉이라는 노래를 내기도 하고, 유곽이라던지 일본 전통 문화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이기에 사쿠란이라는 영화에 가장 완벽한 음악 감독이었다고 본다.
2004년부터는 동경사변의 활동과 병행하였다. 동경사변의 소개는 일전 에디터의 글에 있으니 흥미가 생긴다면 한 번 찾아보기를 바란다. 동경사변의 1집 〈교육〉은 날것과 같은 록적인 느낌이 강했는데, 2집 〈성인(어덜트)〉부터는 재즈풍의 느낌이 강하게 띄기 시작한다. 앨범 제목과 같이 마치 '어른의 음악'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매력적인 앨범이다. 시이나 링고 개인의 음악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점차 재즈 록적인 방향으로 변화해 간다. 아마 이 지점이 내가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게 된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른의 향수를 내게 건네던 그녀
시이나 링고는 과한 노출을 즐기지도 않고, 수위 높은 가사를 쓰지도 않으며, 성적인 어필 또한 딱히 하지 않는다. '어른의 음악'이라고 하면 그런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를테니. 그러나 시이나 링고는 아니다. 내가 그녀에게서 느꼈던 것은 분명 어떤 종류의 성숙함이었고, 그것은 아마 음악에 스며들어있던 것이었다. 이제는 내가 그때 맡았던 향을 풀어볼까 한다.
시이나 링고 - 미채(迷彩)
시이나 링고 3집에 수록된 곡이다. 곡 제목은 미채 (迷彩). 미채는 영어로는 카모플라쥬, 즉 위장을 뜻한다.
ねえ一層遠く知らない街に隠居して沈黙しませぬこと?
저기요... 좀 더 멀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침묵하지 않을래요?
こんな日々には厭きたのさ ねえだうぞ攫つて行つて
이런 나날에는 질렸어요 부디 나를 데려가 줘요...
시이나 링고 - 길고 짧은 축제
미채가 내게 어른의 은밀한 속삭임을 건넸다면, 길고 짧은 축제는 그 어른의 불안정한 생기를 보여주는 곡이었다. 또, 시이나 링고를 처음 접하게 됐던 곡이기도 하다. 듣자마자 너무 좋아서, 무슨 노래인지 샅샅이 찾아볼 정도였다. 길고 짧은 축제는 뮤직 비디오와 함께 감상해야 그 의미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뮤직 비디오를 가져왔다.
마치 시이나 링고를 연상시키는 쇼트 커트에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나온다. 여자는 혼자 집에서 나와 밤거리를 걷다가 재즈 바에 들어가고, 이내 홀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춤에 몰두한 여자는 만족했는지 다시 나와 밤거리를 거닌다. 그러다 드넓은 잔디 앞에서 원피스로 보였던 겉옷을 벗고, 신발을 벗는다. 이때 화면이 그녀의 집 욕실로 전환되는데, 욕조의 덮개를 여자가 열자 입이 테이프로 막힌 채 감금당한 남편이 나온다. 신발을 벗은 여자는 잔디 위에서 슬리브 차림으로 미친듯이 춤추기 시작하고, 욕조에서는 광기에 찬 일방적인 키스를 나눈다. 이 장면이 계속 교차되며 고조되어간다.
키스하던 여자는 갑자기 남편을 살해하려 샤워기로 구타하기 시작한다. 샤워기와 발로 구타하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 홀로 춤추던 모습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엔 붉은 빛들이 울렁인다. 경찰을 마주한 그녀는 슬퍼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아쉬운 듯, 그러나 춤은 충분히 추었고 후련하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렇게 뮤직 비디오는 끝이 난다.
人生なんて飽く気ないね
인생이란 거 덧없네
まして若さはあつちう間
하물며 젊음은 한 순간
今宵全員が魁、一枚目よ
오늘 밤 우리 모두가 주역이야
一寸女盛りを如何しやう
잠깐, 한창 때인 여자를 어떻게 하지?
この侭ぢや行き場がない
이대로라면 갈 곳이 없어
花盛り色盛り真盛りまだ
만개한 꽃처럼 한창일 때에,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