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아주 오래전, 어쩌면 그보다 더 옛날 옛적의 이야기입니다. 한 할아버지가 여느 때와 같이 대나무를 베고 있었어요. 열심히 대나무를 베던 할아버지는 빛나는 대나무를 발견합니다. 그 대나무에 다가가자... 아니, 이게 뭐야! 그 안에 작은 여자아이가 있는 겁니다! 갓난아이를 두고 갈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집에 아이를 데려오고, ‘가구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가구야는 무슨 복을 가지고 있는지 베어오는 대나무마다 안에서 엄청난 돈이 나옵니다. 덕분에 영감 부부는 어느새 유복한 삶을 살게 되었어요. 사흘이 지나자 무럭무럭 자라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되었고, 소문을 들은 수많은 남자들이 결혼하고 싶다고 찾아왔지만 가구야는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영감 부부와 살던 가구야는 어느 날, 달의 사람들이 자신을 데려갈 시간이 왔음을 직감하고 이별을 고합니다. 그녀를 딸처럼 키운 부부는 군대까지 동원해 환송을 막으려 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가구야는 자신의 고향인 달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각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에서 내려져오는 설화, 가구야 공주 이야기랍니다. 끝!


끝?


끝이라니. 달에 돌아가 각자 행복하게 살았다ㅡ로 해피 엔딩이라니. 완전히 해피 엔딩인 '척' 아닌가. 배드 엔딩보다 더 괘씸하다! 설화는 입과 입으로 전해져내려 고착화된 이야기이니, 이제와서 이야기를 바꿀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엔딩ㅡ해피라고 주장하는ㅡ뒤에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이야기를 바꿀 순 없어도, 더 써 내려갈 수는 있으니까. 그렇게 '가구야 공주 설화'의 또 다른 엔딩을 위해 달려가는 애니메이션 영화 《초 가구야 공주!》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해피 엔딩을 바라는 《초 가구야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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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가구야 공주!》는 2026년 1월 22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영화로, '가구야 공주 이야기' 혹은 '타케토리모노가타리'로 불리는 일본 고전 설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가구야 설화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인 만큼 기본적인 설정은 원작 설화와 그대로 이어지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서브컬쳐' 문화의 결합이 신선한 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도쿄에 홀로 상경한 고등학생인 이로하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허덕이는 나날을 보낸다. 한계에 다다른 어느 날, 무지갯빛의 전봇대에서 갓난아이가 나타난다. 아이를 두고 갈 수 없었던 이로하는 결국 아이를 집에 데려오고, 사흘만에 쭉쭉 자란 아이에게 '가구야 공주 설화'를 들려주며 '가구야'라는 이름을 붙인다. 가구야는 설화를 듣자마자 불행한 결말이라고 소리치지만, 정해진 건 바꿀 수 없다는 이로하의 말에 스스로 해피 엔딩을 만들어 보겠다고 선언한다.

 

이로하는 가상 공간 '츠쿠요미'의 AI 라이버인 야치요의 팬이다. 야치요는 이로하가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구원자 같은 존재다. 이로하를 따라 츠쿠요미에 들어간 가구야는 라이버가 되겠다며 이로하에게 자신의 프로듀서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가정사로 음악을 그만두었던 이로하는 가구야를 계기로 구석에 넣어두었던 피아노에 다시 손을 대고, '이로P(프로듀서)'로서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혜성처럼 등장한 가구야는 라이버로 엄청난 인기와 돈을 얻으며, 설화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청혼도 받게 된다. 어느새 돈방석에 앉은 이로하는 가구야와 함께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야치요와의 첫 합동 라이브가 끝난 뒤, 무작정 지구로 도망간 가구야를 달로 데려가기 위해 달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가구야 또한 자신은 돌아가야하고, 운명은 결국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은 역시 가구야 공주였다고. 그리고 이로하는 그 운명을 바꾸기 위해 달의 사람들을 막기로 결심한다.

 

 
넌 가구야 공주가 아니야. 더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지. 옛날이야기랑 전혀 다르다고···.
 

 

환송의 날, 가구야는 졸업 라이브를 하고, 이로하는 친구들과 함께 달의 사람들에 맞서 싸우지만 패배한다. 가구야는 설화의 운명 그대로 달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 가구야가 없는 일상으로 돌아온 이로하는 며칠 간 폐인처럼 지내다, 학교로 돌아와 진학할 대학을 결정하고, 이전의 일상을 유지하려 애쓴다.


 

옛날 이야기같은 가구야와의 생활이 끝나고 이로하는 일상을 되찾았습니다. 이것이 이로하와 가구야 공주의 이야기.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그런 식으로 끝낼리 없잖아!"

 

 

이로하는 자신의 결정을 부정하고 달려나간다. 가구야 공주의 설화는 이렇게 끝낼 수 없으니까. 가구야는 자신의 삶을 바꿔줬기에. 그리고 가구야가 말했던 스스로 써 내려가는 해피 엔딩, 그 엔딩을 자신이 써 내려가야하기 때문에.

 

 

 

고전 설화와 서브컬쳐의 만남


 

전반적인 스토리는 카구야 공주 이야기와 유사하게 흘러가지만, 작중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가상 공간이 있다. 바로 '츠쿠요미'. 츠쿠요미는 달과 가장 비슷한 형태를 띄는 가상 공간으로 자신의 아바타를 만들어 누구나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으며 야치요가 관리자 및 가희로 존재한다. 작중 시대상은 2030년, 기술력의 발전으로 VR기기가 아닌 콘텍트렌즈형 디바이스를 끼고도 들어갈 수 있는 생생한 공간이지만,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인터넷 기반의 '가상' 공간이기에 맛도, 냄새도 맡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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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쿠요미에서의 이로하와 가구야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이 공간에서는 각자가 커스터마이징한 아바타를 생성하여 들어갈 수 있다. 이는 현실에서 '버츄얼 유튜버'를, 누구나 방송할 수 있는 가상 공간은 '방송형 플랫폼'과 연상시킨다. '버츄얼 유튜버'란, 스트리머 본인을 노출하지 않고 특수 장비를 통해 자신의 움직임이나 표정을 가상의 캐릭터에 연동해 방송하는 인터넷 방송인을 말한다. 또, 츠쿠요미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라이버'라고 칭하는데, 라이버는 일본에서 버츄얼 유튜버 업계를 가리키거나 방송인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기도 하다.

 

이 외에도 합동 라이브 중 〈월드 이즈 마인〉을 커버하여 부를 때 원곡 앨범 커버를 재현하는 장면, 솔로 라이브 중 VR 전용 리듬 게임인 비트세이버를 하는 장면 등 다양한 서브컬쳐 요소가 등장한다. 굳이 알고 봐야할 필요는 없지만, 서브컬쳐 문화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보이는 장면들이 다를 것 같다. 작품은 단순한 설화와 애니메이션의 결합을 넘어, 여러 서브컬쳐 문화를 자연스럽게 엮어냈다. 소위 말하는 '오타쿠'들에게는 알면 알수록 보이는 즐거움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문화의 신선함을 전달한다.

 

 

 

재탄생한 보컬로이드 명곡


 

《초 가구야 공주!》가 방영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음악’이었다. 노래 제공에 참여한 프로듀서진만 살펴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Ryo, yuigot, Aqu3ra, HoneyWorks, 40mp, kz까지 고전 보컬로이드 명곡의 역사를 써 내려온 프로듀서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를 반영하듯, 작품에는 신곡뿐만 아니라 기존 보컬로이드 곡을 리믹스한 음악들도 삽입되었다. 그렇게 재탄생한 곡으로는 ryo의 〈월드 이즈 마인〉과 〈멜트〉, 그리고 yuigot이 편곡한 〈해피 신시사이저〉등이 있다.

 

 


World is Mine - CPK! Remix

 

 

〈월드 이즈 마인〉은 2008년 니코니코 동화에 투고된 하츠네 미쿠의 오리지널 곡으로, '미쿠 헌정곡'이라고 불리는 곡이다. 원곡자인 Ryo가 편곡을 담당했다. 이에 편곡의 퀄리티와 별개로 월드 이즈 마인이 티저로 공개된 이후, '미쿠만을 위한 노래를 왜 편곡하느냐' 등의 서브컬쳐 팬들의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첫 가사부터가 '세상에서 제일 가는 공주님'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가구야 '공주' 설화를 재해석한 본 작품과도 연결된다. 작중 야치요와 카구야의 합동 라이브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통통 튀는 발랄한 곡이 무대를 즐기는 서로에게 잘 녹아들어 흐뭇하게 보게 되는 장면이었다.

 

 

Melt - CPK Remix

 


〈멜트〉는 2007년 투고된 보컬로이드계의 전설적인 곡이다. 역시 원곡자인 Ryo가 편곡까지 담당했으며, 스페셜 트랙으로 작중 삽입되진 않았고 엔딩곡으로 나온다. 음성 합성 엔진을 '로봇'처럼만 다룰 수 있다는 편견을 깨며, 이후 우타이테의 '불러보았다' 문화 및 서브컬쳐계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량하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편곡이 작품과 잘 맞아떨어진다.

 

 

 Happy Synthesizer Cover

 

 

〈해피 신시사이저〉는 2010년 니코니코 동화에 투고된 메구리네 루카와 GUMI의 곡으로, Yuigot이 편곡을 담당했다. 원곡과 동일하게 밝고 경쾌한 느낌을 그대로 가져왔다. 가구야와 이로하의 일상 장면에 삽입된 곡으로 가구야를 보며 웃는 이로하의 컷에 담기는 '해피 신시사이저, 봐봐. 눈물 닦아주는 멜로디를 연주할게.' 라는 가사가 이별을 암시하면서도, 가구야가 이로하에게 전하고 싶었던 감정 같다고 느꼈다.

 

작품 속 들어간 다양한 서브컬처 요소들의 연장선으로, 보컬로이드 노래를 즐겨 들었던 이들에게 자연스레 반가운 음이 전해질 것이다.


  

 

이야기는 다시 써 내려갈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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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 운명을 이야기의 결말로 치부한 거라면, 종이 한 장을 더 가져와 이어쓸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설화를 듣고 '해피 엔딩'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겠다는 가구야에 이로하는 '평범한 엔딩' 정도면 만족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달의 사람들이 찾아온 후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그를 향해 신나게 달려가는 것이 해피 엔딩이라는 가구야의 말에 이로하는 스스로 자신의 해피 엔딩을 쓰기로 결심한다.

 

수많은 엔딩 속의 이로하의 해피 엔딩은 하나다.

 

가구야와 함께하는 것.

 

오랜 설화를 다시 써 내려가는 애니메이션 답게, 음악 역시 고전 보컬로이드 명곡을 재탄생시켰다. 리믹스 이외에도 《초 가구야 공주!》 방영 전, 우타이테의 '불러보았다' 투고 형식을 유튜브에 커버곡을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바이럴하며 마치 십여 년 전의 서브컬쳐 문화가 되살아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의 결합, 과거를 다시 되뇌이도록 하면서도 그대로 흘러가지 않고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써내려간 작품들. 《초 가구야 공주!》는 음악으로도 이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초중반까지 정석적인 가구야 설화를 따라간다면, 후반부부터는 끊임없는 반전이 이어진다. 그렇게 이 작품은 설화를 꺾어내는 것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서 써 내려간다. '초(超)' 가구야 공주라는 제목처럼 과거와 현재를 뛰어넘어.

 

 

 

에디터 명함 길유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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