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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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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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해 5월, 아키하바라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애니메이션과 서브컬쳐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아키하바라는 일본 여행 중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였다. 아키하바라의 길거리는 참 오묘하고 신기하다. 한 쪽은 포스터를 건네며 가게로 들어오라는 메이드들이, 한 쪽은 미소녀 피규어를 가득이 안고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언뜻 보면 서로의 요건이 충족될 것만도 같은데... 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오타쿠는 '미세한 차이'에 버튼이 눌린단 말이다. 같은 피규어여도 2009년산 짜리와 리메이크 된 2017년산 짜리를 단번에 구별해내는 게 일본의 오타쿠다. 그런 이들이 '캐릭터'와 '사람'을 동일 선상에 둔다? 오타쿠 실격이다.

 

어찌 되었든 아키하바라는, 그 미묘한 차이를 기준으로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이들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오타쿠들은 실로 까다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어째서 오타쿠는 '실존 인물'이 아닌 허구의 존재인 '캐릭터'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그렇다면 오타쿠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고 지금까지 오게 되었을까?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는 그 시발점을 다룬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앞서 저자인 아즈마 히로키의 의도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그는 '이 책에서 필자는 '포스트모던'이라는 개념을 축으로 하여 종래의 서브컬쳐론에는 없었던 시점을 제시하였고,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게임을 하는 것'이 그대로 '사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사고의 회로를 개척하고 싶었다'고 한다. 또한 본문에서 언급하는 '포스트모던'은 60년대 이후 혹은 70년대 이후, 보다 좁게 보아 일본에서는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지표로 '70년대 이후의 문화적 세계'라고 정의한다.

 

 

 

오타쿠, 그리고 오타쿠계 문화


 

'오타쿠'라는 말은 원래 70년대에 대두한 새로운 서브컬쳐의 주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가 서브컬쳐 집단의 명칭으로서 사용하는 '오타쿠'라는 표현의 기원을 찾자면 1983년, 나카모리 아키오가 처음으로 쓴 표현이다. 또한 70년대-80년대에 걸쳐 오타쿠들이 서로를 '오타쿠'라고 불렀던 데에서 점차 비롯되었다. '오타쿠'라는 사회적으로 알려진 것은 엽기적인 범죄 사건이 계기였으며, 이후 당시 한 주간지에서 오타쿠란 '인간 본래의 커뮤니케이션에 서툴고 자기의 세계에 틀어박히기 쉬운 사람들'이라고 해설했다. 오늘날 오타쿠를 향한 대중의 시선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걸 보면, '오타쿠'의 비사회적인 이미지는 단순히 사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 문화의 원류가 미국 서브컬쳐로부터 비롯되었고, 2차대전의 패전과 연결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타쿠 문화'가 아닌 '오타쿠계 문화'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일군의 오타쿠계 서브컬쳐의 기원은 기본적으로 60년대라고 생각된다는 점과, 나머지 하나는 현재 오타쿠계 문화의 주역은 대략 세 세대로 나뉜다는 점이다. 〈기동전사 건담〉을 십대에 본 60년대 전후 출생의 1세대, 앞 세대가 만들어낸 발전되고 세분화된 오타쿠계 문화를 십대에 누린 70년대 전후 출생의 제2세대, 〈에반게리온〉을 중고등학생 때 시청한 80년대 전후 출생의 제3세대로 나뉘는데, 이 세 세대의 취미 향유와 지향의 방식이 차이를 띄고 있기에 저자는 '오타쿠 문화'라고 통틀어 말하기보다는 '계'를 사용하여 구별하였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제3세대의 새로운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다.

 

 

 

오타쿠와 포스트모던


 

저자는 오타쿠와 포스트모던의 연결을 위해 시뮬라르크,  모에 요소, 커다란 이야기, 작은 이야기, 이야기 소비, 데이터베이스 소비 등 여러 개념을 등장시킨다. 개념을 이해하면 저자의 의도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다. 간단하게 저자가 언급하는 몇 가지의 개념들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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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시뮬라르크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데, 책에서는 주로 2차 창작을 말한다. 2차 창작이란 원작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을 다시 읽어내 제작되고 매매되는 동인 게임이나 피규어 등의 총칭이다. 기존 원작은 '오리지널'이라고 칭할 수 있지만 2차창작은 '복제'라고 보기에는 애매한데, 이를 포스트모던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예견한 문화산업의 미래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오리지널과 복제의 구분이 희미해져 그 어떤 것도 아닌 '시뮬라르크'라는 중간 형태가 자리하게 될 것이라 예측했다. 예를 들자면 에반게리온의 제작회사는 스스로 본편의 패러디적인 소프트를 발매하며 생산자에게조차 오리지널과 복제의 경계가 희미해졌음을 알 수 있다. 윗 사진은 에반게리온 마지막 화의 한 장면으로, 본편에서는 무뚝뚝하고 쿨한 소녀로 그려지는 '레이'라는 캐릭터가 주인공인 '신지'의 망상 속에서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모습을 잠깐 보여주는 평행세계적인 회차이다. 제작사가 스스로 2차 창작을 주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2차 창작은 '모에 요소'로 이루어진다.

 

모에 요소란 캐릭터가 가지는 매력적인 속성을 뜻한다. 이는 말로 설명하는 것 보다는 이미지를 통해 이해하는 편이 쉽다. 위의 이미지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트윈테일에 세라복을 입고 동물귀나 악마 뿔 등의 요소를 지닌 소녀들은 적대심이라고는 하나 없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서로에게 총과 도끼를 겨누고 있다. 실존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서로 총과 도끼를 들고 있는 상황이 어떠한지 생각해보면, 윗 이미지에서 모에 요소가 캐릭터에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저자는 커다란 이야기를 언급하는데, 리오타르와 오쓰카의 관점으로 나뉜다. 본문에서는 리오타르의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으로 언급하지만 나는 구분하기 쉽도록 거대서사의 조락으로 표현하도록 하겠다. 거대서사의 조락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처음으로 지적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개념이다. 이는 하나의 이념이나 기준이 더이상 개인의 삶을 대표할 수 없으며, 인간은 수많은 작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인데, 이와 오타쿠들의 행동이 대응한다고 이야기한다. 오타쿠들은 허구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허구를 택한다. 이는 사회적 현실이 부여하는 가치규범과 허구가 부여하는 가치규범을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해낸 결과이다. 이 특징이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예를 들면 '사람과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규범이 개인, 즉 '애니메이션과 게임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오타쿠에 의해 완전히 조각나버렸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서론에서 말했던 오타쿠가 허구의 인물을 택하는 이유와도 귀결된다. 오타쿠는 사회적 규범에 맞추어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삶에서 우선적인 가치는 사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혹은 게임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오쓰카 에이지의 커다란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야기 소비론이라는 개념도 풀어나갈 수 있다. 오쓰카가 말하는 '작은 이야기'는 특정한 작품 속에 있는 특정한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이며, '커다란 이야기'란 그러한 이야기를 지탱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설정'이나 '세계관'을 의미한다. 오타쿠계 문화에서 소비자들은 설정과 세계관, 즉 커다란 이야기에 과도하게 몰입하지만 이는 작품으로 팔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 단편인 '작은 이야기'를 상품성으로 파는 이중전략을 시행한다. 오쓰카는 이 상황을 이야기 소비라고 일컫는다.

 

이후 이야기 소비였던 오타쿠계는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넘어간다. 데이터베이스는 오타쿠들에게 2차 창작을 위한 '설정'과 같다. 데이터베이스는 데이터베이스로 존재하며, 소비자가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따라 다른 표정을 드러낼 수 있다. 즉, '설정'에 손을 대기만 하면 소비자는 그곳에서 원작과 다른 2차 창작을 무한히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흐름이 무질서한 시뮬라르크의 범람을 일으키는 것 같지만, 데이터베이스라는 설정이 있다면 읽어내는 방식에 따라 원작도 가능하고 2차 창작도 가능하기에 완전히 무질서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동물화


 

동물은 욕구를 가진다. '욕구'란 특정한 대상을 가지고 그것과의 관계에서 충족되는 단순한 갈망이다. 동물은 그 갈망이 충족되면 만족한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을 가진다. 욕망은 충족되어도 사라지지 않으며, 타자가 나를 욕망해주기를 바라는 상호적인 구조를 가진다. 즉, 인간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필요로 한다. 코제브가 언급한 '동물적'은 미국형 소비사회를 말한다. 이는 소비자의 요구가 가능한 한 타자의 개입 없이도 순식간에 충족되도록 날마다 개량이 거듭난다. 식사는 배달 및 패스트푸드로 대체할 수 있으며, 연인은 어플로 만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인간이 '동물화'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타쿠 역시 '동물적'인 소비행동을 한다. 그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질리면 또 다른 모에 요소를 가진 캐릭터를 찾으며 소비한다. 이러한 변덕으로 인해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금방 관심을 가지기도 하며, 그러한 요소들을 조합해 또 유사하고 새로운 작품들이 나온다. 즉, 이들은 인간 욕망의 핵심인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구조’를 배제한 채 즉각적 만족만을 추구한다.

 

결국 핵심은,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하지만, 동물적 소비는 그 시선을 제거한 채 즉각적인 만족만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캐릭터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다 읽었으니, 다시 아키하바라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보자. 한 쪽에는 메이드, 한 쪽에는 미소녀 피규어들을 잔뜩 안고 가는 오타쿠들. 이 오타쿠들이 메이드 카페에 가지 않는 이유는 과도한 데이터베이스적 소비가 '욕망'을 이미 배제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메이드 카페에 들어가면 하이톤으로 반기는 메이드들과 가볍고 긴 대화가 즐겁게 이어지겠지만, 이 식사 시간이 끝나면 처참하게 뒤돌아가버릴 것이라는 사실이 오타쿠들 발걸음을 붙잡는 것이 아닐까. 메이드에 국한되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현실의 타자와 관계를 통한 감정 소비는 데이터베이스적 소비에 익숙해진 오타쿠들에게 리스크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비하여 캐릭터들은 그들의 옆에 온전히 있어준다. 오타쿠들은 이미 자신이 일방적으로 애정표현을 할 수 있는 허구의 캐릭터에 익숙해진지 오래일 것이다. 가상의 캐릭터는 화내지 않고, 불만을 표출하거나 이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살아있지도 않으며, 대꾸하지도 않는다. 그저 소비 가능한 형태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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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1년에 일본에서 간행되어 가장 최근 애니메이션인 에반게리온을 세대를 제3세대로 정의했지만, 약 20여년이 지난 지금 오타쿠계 문화에는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떠오르는 것은 2007년에 만들어진 음성 합성 엔진인 '하츠네 미쿠'다. 하츠네 미쿠를 시작으로 보카로p, 즉 보컬로이드 프로듀서들이 생겨나 일본 음악계에는 새로운 돌풍이 불었다. 이 어색한 기계음은 하나의 새로운 장르가 되었고, 오타쿠들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이 아닌 '음성 합성 엔진 캐릭터'의 덕질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부흥은 '2차 창작'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AI의 가파른 발전으로 이제는 애니메이션 혹은 게임 캐릭터들과 가상 대화가 가능해졌다. AI 채팅 봇에 각 캐릭터의 성격이나 요소 등을 프롬포트로 입력하고 시행하면,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대화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어쩌면 대꾸하지도 못했던 가상의 캐릭터는 이제 높은 수준의 상호작용까지 일궈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것이 오타쿠들의 '욕망'이라고 봐야할 지도 모르겠다. 사람 대 사람과 그 사이에서의 욕망이 수백만년 전부터 이루어졌다면, 사람과 캐릭터의 욕망 역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코제브가 말한 인간적 '욕망'은 유효할 것이다. '캐릭터의 물건을 사고 싶다'는 욕구이지만 '전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생산되지 않는 피규어를 구매하여 자랑하고 싶은 것'은 타자의 시선을 전제로 하는 욕망이다. 욕망은 결국 타자라는 존재가 있어야만 해소된다.


다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아즈마 히로키의 의견이 다소 단편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서 의미하는 '오타쿠'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딥한 오타쿠에 해당되는 것 같은데, 이 딥한 오타쿠의 기준을 어디서 잡아야 하는가부터가 논제다. 2차 창작을 즐기면, 모에 요소를 좋아하면 무조건적으로 딥한 오타쿠인가? 피규어 구매를 즐기지 않지만 애니메이션을 100여편 넘게 본 오타쿠는 라이트한 오타쿠인가? '데이터베이스적 소비를 하는 오타쿠'에 대한 기준점과 오타쿠라는 기준점이 동일한가에 대하여 의문이 들었던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매우 인상적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오타쿠 문화를 포스트모던과 연계하여 바라본다는 점이 대단한데, 간행 당시엔 얼마나 선구적이었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나는 개념을 위주로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책의 모든 개념을 다 정리한 것은 아니고, 책에는 스노비즘과 해리적 인간 등 더 많은 개념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시간이 있고 서브컬쳐를 좋아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에디터 명함 길유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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