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이 되면 저는 한 번씩 관계 정리를 합니다. 다음 해에도 내 인생에서 누구와 계속 함께할지 판가름하는 ‘해고’ 느낌의 정리는 아니고요, 올해에 새로 생기거나 유지된 혹은 작별한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회고’ 느낌의 정리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는가. 이 반복된 반성의 질문으로 처음을 장식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특정 관계의 시작이나 서로가 변하게 된 계기 또는 그 사람과의 잊지 못할 기억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라요. 그렇게 한참을 보낸 뒤에 다짐하죠. ‘아, 내년에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네, 정말이지 이렇게나 진부한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정작 말할 때는 내가 마치 이미 ‘좋은 사람’의 약 90%쯤 도달한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요.
한편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인간관계는 참 오묘하다. 귀찮다가도 기대하게 되고, 더없이 산뜻하게 좋은 관계로 한 번쯤은 아니 꽤 여러 번 남고만 싶다니. 그걸 연말연시마다 되새기다 보니 결국 ‘좋은 인연’의 의미를 곱씹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어요.
그런데 영화 〈소공녀〉를 보고 있으면 이러한 생각들이 몇 개의 진한 공백으로 가득 차며 다시금 물음표를 던지게 됩니다. 요즘 같은 때에 ‘좋은 사람’, ‘좋은 인연’은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요?

미소는 ‘문영’의 말마따나, ‘여전한’ 친구예요. 담배를 사랑하고 한 잔의 위스키를 사랑하고 자신의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이자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 사람이죠. 그런 그의 삶을 방해하는 요소가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돈 문제. 시도 때도 없이 올라가는 물가와 집세에 비해 눈치 없이 동결된 일당은, 그나마 쥐고 있는 것들 중 하나를 포기하라 말합니다. 그의 선택은 현대인이라면 가장 매달리는 것 중 하나인 ‘집’이었습니다.
사실 그건 단순한 집(house)을 넘어 나의 보금자리, 하나뿐인 쉼터, 아늑한 안정감을 느낄 기회를 포기하는 것과 같죠. 사랑하는 것을 버리는 대신 불확실함을 택한 채 집(home)을 나간 미소는, 그때부터 계란 한 판과 함께 자신의 대학 동기 밴드부원들을 한 명씩 찾아갑니다. 하룻밤을 재워줄 사람들,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보기 위해서요.
그리고는 기껏 찾아간 그 공간에서 하소연과 푸념으로 자신의 사정을 토로하기보단, 오히려 상대의 얼룩진 삶을 들어주고 위로하다 이내 조용하게 스쳐 갑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언제나 따뜻한 밥 한 끼와 깨끗해진 집, 그리고 진심이 담긴 눈길과 쪽지만이 남아요.
심지어 그토록 사랑하던 남자친구 한솔이 경제적 책임감에 먼 타국으로 떠날 때도, 고용인이던 민지의 새 출발을 위해 자신은 일자리에서 곧 잘릴 상황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소는 자신의 안부를 강요하지 않아요. 언제나 그랬듯이, 빚을 지긴 싫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한편, 할 수 있는 한에서 그들을 챙기고, 나는 내 살길을 알아서 찾아가려 합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희생을 감행하지도 않는 채로 말이에요. 그는 자신이 최소로 필요로 하는 것들은 소중히 하면서도 자기 가치관은 지키고, 남의 감정과 상황도 받아들이며 본인이 해줄 만한 일을 찾곤 했죠.
어쩌면 미소의 행적은 돈과 등가교환으로 모든 소유와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로부터 홀로 동떨어져 사는 ‘유니크한’ 삶입니다. 약간의 경제적 마지노선에 보살핌과 이해를 더해, 나와 다른 사람을 메우며 살아왔으니까요.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저는 그런 미소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적절한 개입과 멈춤, 내 사람에 대한 정과 배려가 깃든 언행들은 저를 반성하게 하고 미소와 같은 태도를 지향하게 했어요.
그런데 요즘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왜 자꾸만 먹먹함이 더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그냥 ‘좋은 사람’만을 담은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현정이 방바닥에 누워 갑갑한 본인의 처지를 떠올리며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을 때. 대용이 앞으로 20년 동안은 꼼짝없이 매여 있을 애증의 아파트를 얘기할 때. 이제는 자기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며 정미가 매몰차게 미소를 대할 때. 민지가 곧 해고할 미소에게 미안하다며 울먹일 때. 그리고 미소가 떠나가는 한솔을 차마 붙잡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바라볼 때.
누군가는 경멸로, 누군가는 서러움으로, 누군가는 안쓰러움으로, 누군가는 무너져 가며 애써 상대를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이 현실의 어긋난 단면들 속, 서로의 사정과 상황에 둘러싸여 어찌할 수 없는 상태로 멈춰있는 장면들을 보고 나면, 한순간 마음이 미어져요. 동시에 현대에 쏟아지는 이 모든 관계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사이가 되었을까요? 언제부터 우리의 관계에 돈과 이해관계가 끼어든 채로, 그것에 좌지우지되며 사는 삶이 정답인 양 선택해 왔을까요? 그 와중에 서로의 눈치를 보며 결정을 내리거나 야멸차게 상대방을 쫓아내는 극단을 수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요.
철저하게 이뤄지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장례식장은 가야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돌리는 청첩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이. 절대 손해 보지 않고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 목표가 된 우리가 그렇게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일대일 맞교환에 무르익는 사이, 미소가 건네는 진심 어린 걱정들을 보고 있자면 저 한구석에서 뻥 하고 뚫려 있던 구멍에 자꾸만 눈물이 차오릅니다.
이게 그렇게 희미하고 희귀한 순간이었던가요. 사실 우리, 그렇게만 살 수는 없잖아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복잡한 인간사에서 그런 삶은 버겁기 마련이니까. 그런데도 그 모든 이해와 위로와 잠시 그 곁에 쉴 수 있는 순간들을 주었던 미소와 같은 사람이, 주인공들에게도 시청자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 걸 보면 씁쓸한 기분마저 듭니다.
이 강퍅한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다 납득할 수도 있겠죠. 근데 그것만으로는 이 모든 가여운 관계의 역동을 대신하기에 부족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좋은 친구였던 미소는 결국, 어느 추운 겨울날 홀로 차디찬 강변 바닥 위 텐트 안에서 떨게 되었으니까요.

우리가 그토록 꿈꿔오고 낭만적으로 생각해온 인연에는, 원래 언제나 예측 불가능함이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같을 수도 없고 완벽하게 닿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 이뤄지는 해프닝들이기에 불안하고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쳤겠죠.
그런데도 인간들은 계속해서 함께 있기를 노력하고 말을 나누고 몸을 기대고 손을 잡아 왔습니다. 누군가에게 끌리기도 하고 그에게로 움직이기도 하고 의존하거나 의존하는 대상이 되면서까지, ‘너’를 알아가려는 몸부림을 좀처럼 그치지 않았죠. 그것이 제아무리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염치’ 없는 관계의 골자처럼 보이더라도요.
오늘날 우리에겐 그런 수고로움을 견디면서 인연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까요? 혼돈과도 같은 지저분한 이 세계를 서로에게 의지한 채 헤쳐나갈 마음은? 시시콜콜한 문제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관계만을 소원하는 태도 말고, 부둥켜안았다가도 밀어내는 그런 사이에 곁을 줄 용기는요? 저는 이 질문들에 아직 쉽게 ‘예’라고 못 말할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의 성과사회에서 이런 인간관계에 대한 잔 고민은 시간 낭비일 수 있고, 이미 이것 말고도 심히 신경 쓸 게 많아서 더 피곤해지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끊임없이 외로워하면서, 생존에 대한 실질적 두려움도 기저에 안고 있다는 거예요.
이전에 들은 한 팟캐스트에선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절대 네가 굶어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게”, 이 한마디가 너무나 나에게 안심이 되었다고. 그건 정말 너와 나 사이에서 우러나온 신뢰이자 의지이고 보살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이 서늘한 사회를 헤쳐나갈 원동력이 아닐까 어렴풋이 상상해봐요.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오지도 않습니다. 인연은 운명이 아니라, 너와 내가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발생한 스파크니까요. 어쨌든 올해도 저는 여전히 다짐해봅니다.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겠다고. 적어도 ‘미소’도 한 번쯤은 누군가를 강하게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