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가족들과 담양에 있는 죽녹원이라는 곳에 간 적이 있다.
푸른 여름 날이었는데 아주 더웠지만 눈을 감으면 시원했다. 모든 시야를 까맣게 만든 뒤 소리에만 집중해 보면 대나무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그때 길게 쭉 뻗은 녹색 잎들이 사락거리며 시원한 소리를 낸다. 담양에서 들린 소리는 바람결을 따라 여전히 여름만 되면 내 머릿속을 맴돈다.
수림뉴웨이브 2025 주제로 '결'이 선정되었고 그 안에 네 번째 아티스트로 서정민 가야금 연주자가 담양에서 온 소리를 주제로 공연을 선보인다. 과연 그녀는 담양에서 어떤 소리들을 담아왔을까. 서정민이 가진 결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전라도에서 10년을 지내며, 마주한 광주의 여러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익숙한 풍경 뒤에 숨은 조용하고 단단한 소리, 그리고 25현 가야금에 전통 가락을 담아 지난해의 수많은 시도의 결실. 서정민 연주자가 지나온 그 결을 따라 시간을 엮어보려고 한다.
1. <먼동이 틀 무렵> - <먼동이 틀 무렵>은 25현 가야금 연주의 첫 시작으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그리듯 강렬하고 다이내믹한 선율을 담아낸 작품이다. 선율에 맞추어 올라갔다 내려갔다 아주 작아졌다 커졌다 오르내리는 음은 구름을 타고 마치 광주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여정의 시작 같은 곡이었다.
가야금 소리를 좋아하지만 연주를 공연장 안에서 듣는 것 자체는 처음인데,내가 평소 듣던 느리고 천천히 진행되는 가야금 소리와 달리, 확실히 '앞으로 본인은 어떤 결을 보여줄 것이다'라는 느낌을 확 받았던 곡이다. 이 <먼동이 틀 무렵>은 내게 서정민 연주자의 결을 느낄 수 있는 첫 시작이 되었다.
2. <산, 山> - solo ver - <산, 山>은 대만예술대학교 수윤한 교수(비파)와 함께한 작업이라고 한다. 수윤한 교수는 광주와 담양의 산을 보며 "대만과는 또 다른 풍경"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에 익숙했던 풍경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고 했다.
서정민 연주자의 테마는 익숙함에서 발견한 특별함이라고 하는데 첫 곡이 서정민 연주자가 앞으로 어떤 것을 보여줄지 드러내는 곡이었다면 <산, 山>은 가야금의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한껏 느낀 곡이었다. 한국 느낌에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느낌이 섞인 느낌을 받았다. 빠르고 어딘가 미스터리한 느낌도 들고 흥미진진한 선율로 구성되어 여러 곳을 여행을 느낌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곡에 비파가 섞이면 어떤 곡이 될지 상상하며 들었던 것 같다. 아쉽게도 비파가 없는 25현 가야금 솔로 버전이었지만, 그 허전함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25현의 폭넓은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3. <물들 다스름> - 호랑무(무용: 박수정) - '물들'은 물이 많은 들판을 뜻하며, 광주의 옛 지명과도 연결된다. 광주에서 생활하다 보면 어느 지역에서든 무등산이 시원한 하늘과 맞닿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광주만의 특징적인 지리적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무대에서는 '물들 다스름'을 주제로, 다 스름 형식 속에 무등산의 풍경을 담아 연주한다. '호랑무'는 3집 YoUtopial 수록곡 〈호랑가시나무〉에 김용성의 '터벌림'을 엮어 미완으로 남아있던 부분을 완성한 작품으로, 이번 무대에서는 박수정의 춤과 함께 선보인다.
박수정 무용가의 춤과 서정민 연주자의 가야금의 소리는 가히 상상을 현실로 구현 해내는 힘이 있었다. 아주 가벼운 바람의 결을 따라 흘러가듯 조용한 몸짓과 안무의 감정을 끌어내는 듯한 가야금의 얇고 날카롭고 빠르고 아슬아슬한 소리가 더욱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음악만을 듣는 것이 아닌 안무와 함께 하니 한편의 기승전결이 느껴지기도 했다.
4. <담양에서 온 소리> - 그녀는 광주 북구 쪽에 머물렀기에 담양을 자주 오갔는데, 담양은 평화로운 분위기와 아기자기한 산들 덕분에, 웅장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고 소곤소곤한 기운이 마음을 의지하게 하였다고 한다.
<담양에서 온 소리>는 그곳에서 들었던 선율을 바탕으로 만든 곡이다. 두 눈을 계속 감고 들었던 곡이다. 가장 기대했고 좋았던 곡이다. 내가 담양 대나무밭 한가운데서 잎들이 바람에 부딪혀 사락거릴 때의 들었던 소리를 다시 되뇌고 상상하며, 들었다. 평화롭고 꿈같은 곡이었다. 연푸른 녹색의 힘을 가진 연주는 내게 다시 끔 담양에서 온 소리를 한가득 담아 들려주었다.
5. < Swimming > - solo ver - Swimming은 광주 무등산에 비가 몰아친 다음 날, 물방울들이 겪어야 할 여정을 상상하며 만든 곡이며, 마지막 장은 '마침내, 함께'라는 의미로 마무리하였다. 25현 가야금 안에 민속악의 주법을 담아내고자 했고, 김일구 선생께 사사한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의 중중모리장단을 선율에 녹여 작업했다고 한다.
비가 온 다음 물방울들이 겪어야 할 여정을 상상하여 만든 곡이라니 서정민 연주자의 개인적인 생각의 결을 느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상 속 모든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눈여겨 음악으로 아름답게 풀어내는 일이 그녀가 가진 힘이자 결 아닐까 생각이 든다.
늘 유행 음악, 최신 가요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작게나마 마음의 쉼터를 찾아 쉬고 가는 느낌이었다. 듣고 나오니 가야금의 여운이 가을의 바람결을 좀 더 진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요즘은 사람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단순 반복을 통해 음악을 만들거나 절반 이상이 영어로 된 가사 음악이 많은데, 그것도 좋지만 이번 가을에는 우리의 전통 소리에 집중하고, 상상하고 이 음악을 따라 우리의 결이 완성 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해 보는건 어떨까. 지속된 관심만으로도 우리의 전통은 계속되고, 멈추지 않는다.
수림뉴웨이브의 이번 공연은 12월 18일까지 이어지니 많은 관심으로 이 결을 함께 이어 만들어 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