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미안>을 처음 접한 건 스무 살 무렵. 읽으면서 이걸 청소년 권장 도서라며 추천하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책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사람의 상황마다 다른데 성장 소설이라고 청소년으로 분류한 것 같았다. 자아를 찾는 불안정한 시기에 읽는다면 일기장 같은 소설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책장에 꽂힌 문학전집 중 어떤 한 권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고 지금도 생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의 나는 자아 찾기 단계를 지났기 때문에 데미안을 통해 성장할 수 없다. 그래서 그때는 모르고 없었지만 이제는 알고 있는 감정과 경험을 배경으로 책을 읽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변함없이 <데미안>은 자아에 대해 고민하는 스무 살 전후에 읽는 게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자아를 찾아 헤매던 시절에 데미안 같은 친구를 만난 과거가 있다. 마찬가지로 나보다 연상이고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의 상황을 이해하는 존재. 데미안의 그 구절도 친구가 알려주었는데 그 상황이 큰 울림을 줘서 한동안 마음에 품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맹목적인 구석도 있었는데 영향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때의 자아 형성 과정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어떠한 정립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누군가의 등을 보고, 내민 손을 잡고 자아를 찾아나가는 건 인생에 있어서 꽤 큰일이다. 이번에 <데미안> 완독에 도전한 것도 사실 그 연장선이다.
나는 나 자신의 체험에서 나왔고, 그것의 추구를 내가 아직 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떤 충고도 남에게 줄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싱클레어의 무른 내면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10대의 나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평범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는데, 내실이 단단하지 않은 상황에서 줏대를 가지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싱클레어의 내면 탐구를 지나온 과거에 빗대어 보게 되었다. 끝없이 내면으로만 향하던 때, 그때는 그게 나에게 있어 제일 중요하고 큰 일이었다. 나는 누구고 산다는 건 어떤 일일까. 하고 싶은 건 진화인데 조금씩 변화만 하면서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르고 흐름에 몸을 실어버린 건 아닌가 불안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부터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파괴되어야 했다.
자아 찾기는 알에서부터 나오는 것,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다음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고된 과정을 거쳐야만 했을까. 그 시절에는 자아를 찾아서 제대로 형성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다. 어떻게 존재해야 하고 무엇이 중요한가. 숨 쉬고 있다고 해서 그걸 한 인간으로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오랜 고민과 고난의 시기를 거쳐 알을 깨고 나온 소감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새가 되어 생활하니 알 속에 있었던 시간은 짧고, 그 세계는 작았다는 걸 깨달았다. 말하자면 진화, 레벨업이다. 첫 번째 단계를 어떻게 지나는지에 따라 이후의 루트가 달라진다는 의미에서는 중요하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일을 생각하면 영향력 대비 신속하게 과거가 된다. 지금을 하지 않을, 그 시절만의 치열했던 고민이 적힌 다이어리를 다시 보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어떤 한 조각은 아니고 기둥 하나 정도. 어떻게 보면 대들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오래전 책장에 꽂혀있던 데미안이 생각났다. 지금은 쓰지 않는 말투와 단어, 아마 <데미안>을 처음 읽은 세대가 기억하는 데미안은 이 데미안에 더 가깝겠다. 최근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과거의 것을 마주할 때 현대적으로 치환하지 않으려고 의식하는데, 예전 판본이 주는 시대감으로 인해 데미안의 시대적 배경을 멀리 두고 볼 수 있었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만남에 21세기 현대 사회인의 언어가 반영되었다면 조금 낯설었을지도 모르겠다. 60년 전의 번역은 친절하지 않고 지금 보기에는 상당히 문어적이지만, 헤르만 헤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번역가의 번역본이라니 책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덕분에 데미안을 더 다르게 읽는 기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