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야와 사고의 확장 -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

예술, 그 뒤에 가려진 것들의 이야기
글 입력 2024.12.1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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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그림 관련된 책을 많이 읽었다. 올해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 책의 향유를 거부하려고 했는데 책 소개를 지나치지 못했다. 부조리와 관련된 키워드만 나오면 되돌아가 한 번 더 눈에 담는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이런 테마가 있었는지 되짚어봤는데 아무래도 없어서 읽기로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도 좋겠지만 이미 이런 책은 목차를 훑고 좋아하거나 흥미를 느끼는 부분부터 읽는 게 습관이 되었다. 당연히 처음 펼친 건 두 번째 장, ‘생의 민낯’으로 구분된 여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 챕터는 카미유 피사로의 딸 잔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가난한 집안의 불행한 아내이자 어머니인 쥘리는 딸 잔느가 미술을 하고 싶어 했지만, 강경하게 반대했다. 반대를 반대하지 못한 잔느는 남자 형제가 저마다 예술을 하는 동안 엄마의 말을 착실하게 듣는 딸에서 아내, 그리고 엄마가 되는 삶을 살았다.

 

 

 

언제나 그곳에 존재했던 여성들


 

그다음은 제일 기대했던 파트인데 기록되지 않았거나 소외된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 어느 순간부터 전시회에 가면 캡션에 적힌 이름에서 여자를 찾을 때가 있다. 예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남자들의 이름으로만 채워진 전시회라면 그 자체로 젠더 이슈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나 해서.


한국 근현대사와 가난이란 키워드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는 수도 없이 등장한다. 상류층이라 해도 수를 놓는 얌전한 여인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똑같이 손으로 하는 일인데 그림은 그리지 못하게 하고, 천 위에 예술을 얹어도 기술이라고 쳐주지 않는다. 그러다 공예도 예술에 편입되기 시작하자 남자 예술가가 자리를 꿰차고 든다. 예술에 국한되지 않는 일이다. 여성들은 끊임없이 배제되고 소외되다가 자리를 빼앗겼다.

 

분야를 불문하고 여성 예술가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초중고 대학교까지 털어보면 예체능, 특히 미술과 음악 교사나 교수를 보면 여성 성비가 높았다. 일반화의 오류일지 모르겠지만 폭을 좀 더 넓히면 문학까지. 지도자가 아닌 학생을 봐도 예술대 역시 여학우의 성비가 높다. 아이러니하다. 남자들이 그렇게 쥐고서 여자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은 세월이 긴데. 심지어 여전히 정교수까지 보면 남자 교수가 그렇게 약세를 보이지도 않는데.

 

작가는 이 파트에서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는가?“ 하는 논문 제목을 ”그녀는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는가?“라고 제목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의 경계를 판단하고 위대한 기준을 정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고.

 

 

 

나에게 붙어있던 가짜 훈장


 

목차를 보면서 궁금했던 메두사의 이야기. 처음엔 세상이 만들어낸 악녀를 떠올렸다. 예를 들자면 마리 앙투아네트. 메두사가 주제라니 여성 멸시 정서는 어디까지 거슬러 가야 하나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서두는 명예 남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뭐지, 메두사를 얘기하는데 명예 남성이 왜 나오지? 했는데 포세이돈이 신전에서 메두사를 범했다는 이야기에 메두사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탓하며 메두사의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든 게 아테나란다.

 

그렇게 악역으로 소비되던 메두사를 평범한 여자로 표현한 건 여성 작가였다. 여성에 대한 성폭행이 범죄로 인정되지도 않을 정도로 차별이 심각하던 19세기에 의과 대학까지 졸업한 레즈비언 작가 해리엇 호스머. 가부장적인 이야기에 갇힌 무고한 여성을 평범하게 만들어내는 시도는 여성에게서 탄생했다.

 

 

 

그것은 부부싸움인가, 폭력인가


 

사실 다음 이야기는 관심이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아내 폭력이야 유명하지 않은가. 그의 작품에 관심이 있지만 국내 전시를 무시한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무심코 넘긴 페이지의 첫 시작, 가정폭력을 당하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2차 가해의 말을 만들어 넣었는데 순간 혈압이 올라서 잠시 책을 덮고 숨 고르기 시간을 가져야 했다. 오래전에 여성 인권영화제에서 본 가정폭력에 대한 작품을 보고 나서 아트인사이트에도 글을 쓴 적 있는데, 굳이 피해자의 결점을 찾으려 들며 말을 얹는 것, 명백한 가해자를 두고 피해자의 행동을 비난하는 건 2차 가해다. 나는 이런 식의 2차 가해를 보면 ‘피해자의 결점 찾기는 가해자 측 변호인단이 하는 일이라던데...’하고 비난한다.

 

호퍼와 그의 아내 조세핀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호퍼는 키 195의 거구이고 조세핀은 155에 45키로 나가는 가녀린 여성이다. 체중만 따지면 조세핀은 호퍼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때린다고? 그걸 인간이라고 불러도 될까.


조세핀이 미술 대학을 나왔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싶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호퍼가 그녀의 활동을 방해한 건 더더욱. 여기서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 소피아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남편은 대문호인데 소피아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종속되어 책 읽을 시간조차 없다고 한탄할 정도였는데 오랜 시간 톨스토이의 아내는 악처였다는 이야기만 전해졌다. 그 생각에 잠재웠던 화가 되살아나려던 때, 조세핀이 비슷한 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부엌데기 같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호퍼에게 종속되다 못해 폭력까지 당했지만 방어기제로 부부싸움이었다고 합리화하는 조세핀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졌다.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가 없었냐고? 남자가 발 벗고 나서서 못하게 막더라고요.

 

*


세 번째 장에서는 아이, 동물, 장애, 외모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데 가장 먼저 손이 간 건 장애를 이야기하는 파트인 ‘생명에는 계급이 없다’였다. 우생학, 차별, 배제, 소외 등 다양한 키워드가 예상되었다. 제일 먼저 등장한 건 독일의 ‘바보 배’였다. 사회적으로 비정상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을 모아 배에 태워 격리했는데 여기에는 지적장애인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비정상, 바보, 지적장애. 뭔가 느낌이 온다. 뒤이어 윌리엄 호가스의 ‘백작 부인의 죽음’이란 작품이 나오는데 장애라는 키워드를 알고 보면 그림 속 저 인물이? 라는 생각이 든다. 차별을 증명하는 동시에 장애인을 배제하지 않고 화폭에 재현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양가적인 표현을 보게 된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전에 지체 장애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나는 누군가를 배척하고 격리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불만이 있다. 이제는 소록도가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하기 위한 수용소가 아니라지만 탈시설 반대 목소리를 들으면 사실상 현대 사회에는 크고 작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소록도가 존재하는 것만 같다. 정말로 장애인의 안위를 생각했다면 제대로 된 돌봄 서비스가 작동하지 못하는 기관을 탓하며 개선을 요구했지 자신의 안위를 우선하면서 탈시설 반대를 주장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장애인을 수용하는 복지 기관. 어디서 어디까지가 복지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이 책이 무거운 주제만 다룬 것은 아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외모 강박에 대한 내용인데 제목은 케이틀린 시엘의 시를 인용한 ‘예쁠 필요 없단다, 그건 네 의무가 아니란다’.


앤디 워홀이 외모 콤플렉스로 은발 가발을 쓰고 터틀넥 등의 아이템으로 앤디 워홀이란 외적인 이미지를 창조했다. 우리는 앤디 워홀이라는 캐릭터를 인지하고 있다. 그 캐릭터의 강렬함으로 배우를 기용해서 대타로 강연에 내보낸 일화까지 보유하고 있다. 예술가다운 일화지만 외모 콤플렉스를 생각하면 마냥 재미있지는 않다. 그런 앤디 워홀은 총격사고 이후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게 된다. 외모 강박을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대중은 그러한 워홀을 쉽게 받아들였다. 타인이 보는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는 외모 강박을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었다.

 

나도 이야기의 말미에 언급한 것 같은 ‘그 모습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자란 세대다. 모든 사람은 아름답다, 사람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 흔한 말들.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사회를 탓하고 자정하려는 말을 듣고 자랐으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나 정도면 괜찮지’라는 걸 자기애나 자존감으로 알고 자라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언제쯤 외모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좀 요원해 보인다. 안 될 것 같은 데서 기운 빼지 말고 우선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며 내면을 다져야겠다.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참고 문헌을 보니 새삼 치밀하게 채워진 책 내용이 실감되었다. 읽으면서 유난히 집중하게 되었던 부분을 참고 문헌을 살피면서 까먹지 않게 기록해뒀다. 사고를 확장하는 건 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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