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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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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시즌에는 가능하면 전시회 관림을 피하는 편이다. 어딜 가든 아이 동반한 가족 관람객이 많아서 평일이나 주말할 것 없이 붐비기 때문. 그러나 퓰리처상 사진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나이 제한이 있어서 사람이 덜한 것도 있지만, 지금까지 본 사진전 중 퓰리처상 전시가 가장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그때 이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며 전시장으로 발을 옮겼다.


전시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말하자면 기획과 구성이 우수했다. 동선을 잘 짜고 바닥에 화살표 표시를 붙여서 관람객의 동선이 꼬일 가능성을 없앴다. 캡션은 단순한 작품 소개가 아니라 줄글로 길게 적어두어서 오디오 가이드 없이도 작품을 감상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글을 읽다 보니 정체구간이 생겼지만 시력이 많이 나쁜 게 아니라면 뒤쪽에서 슬쩍 읽을 수 있다. 나는 뒤에서 설명을 빠르게 훑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작품을 보며 속도를 내서 관람했다. 동영상 자료가 많았던 건 아니지만 유명 작품이나 국내 작가의 수상작의 배경을 알 수 있는 본인이나 동료 작가 인터뷰 영상을 제공해서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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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설명한 부분과 함께 이번에 유달리 감명 깊었던 건 각 섹션에 등장하는 사진기자들의 말을 벽면 상단에 크게 붙여둔 것. 전시장에 들어서면 ‘과거가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까?’라는 문구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여기서 한강 작가의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말이 떠올랐다. 더불어 노벨 수상자 강연문 ‘빛과 실’의 내용이 겹쳤다. 사람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일 수 있으며 반대로 어떻게 폭력의 반대에 설 수 있냐고 말하는 부분. 그 말을 곱씹으며 사진 앞에 머무르길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러나 기자들에게는 모두 현실이다"

 

- 캐럴 구지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캐럴 구지, 퓰리처상 사진전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코소보 전쟁 당시 철조망 사이로 작은 아기를 넘기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모두가 갈 수 없다면 아이에게라도 안전한 세상을 주고 싶어서 철조망 사이로 아이를 넘긴다. 아이만 보내야 하는 건 슬픔일까 아니면 다행일까. 우리에게 전쟁이란 이 땅에서 벌어졌지만 교과서로 배우는 먼 과거의 일, 다른 대륙에서 벌어지는 뉴스를 통해 듣게 되는 사건이다. 같은 공간이나 같은 시간인데도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ID:시카고 걸’을 통해 거리를 뛰어넘어 같은 현실로 만든 사례를 보면서 전쟁(시리아 내전)과 일상(시카고 거주 시리아인)의 괴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후반에 그 시리아 내전 사진이 등장했다. 민주화 운동으로 시작되어 피의 내전으로 끝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은 아이들이 뛰놀던 공원을 묘지로 만들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시체가 넘쳐나서 시신을 묻을 곳이 없어서 일상적인 놀이 공간이 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전쟁터를 오가는 작가들에게 모든 것이 전부 현실이었겠지. 전쟁 난민을 보며 후원 문자를 보내는 이곳에서의 삶과는 무척이나 다르다.

 

 

"어쩔 수 없어요. 전쟁을 끝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 맥스 데스포

 

 

한국인에게 반파된 대동강 다리를 건너는 피난민의 사진은 익숙하다. 수많은 한국전쟁 사진 중에 하나라서 한겨울 강물 위 앙상한 철교를 어떻게든 건너는 모습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옆에 전시된 ‘눈 무덤을 헤치고 나온 손 끝‘을 보니 마음이 철렁했다. 진짜 무덤이 아니라 눈이 시신을 뒤덮고 있었다. 미처 손끝까지는 가리지 못한 눈으로 만들어진 무덤.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데 아는 죽음이 아니라서 강렬했다. 전쟁은 죽음을 기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이 녹은 후의 그 시신은 어떻게 되었으며 시신을 뒤로하고 갈 수밖에 없는 마음은 어땠을까. 그의 가족은 남쪽에 있을까 북쪽에 있을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삶을 살다 눈을 감지는 않았을까. 끝나지 않은 전쟁 속에 산다는 것을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때로는 카메라 렌즈에 그저 눈물만 가득 찹니다."

 

- 스탠 그로스펠드

 

 

앙상하게 마른 난민 모녀의 사진이다.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아이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마른 손이 먼저 보이고 그다음에는 아이의 순수한 눈망울 마지막으로 뼈가 튀어나온 아이의 몸에서 안쓰러움을 느끼게 된다. 사진 설명을 보면 사람의 권력만큼 잔인한 건 없는 것 같다. 이게 에티오피아 정부의 아사 작전이라니. 내전 당시 대기근으로 사망한 사람은 50만 명, 대부분의 아사자는 어린아이라고 한다.


미디어의 나오는 전쟁 난민에는 거의 항상 ‘기아’라는 키워드가 붙어있다. 기아체험 행사, 후원을 독려하는 영상 속 가느다란 어린아이의 팔과 다리, 전쟁을 겪은 세대가 이야기하는 부족했던 보급물자와 굶주림. 전쟁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식량 부족과 배급 문제가 아니라 그걸 권력을 위해 이용했다는 부분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악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을까.


 

 

폭력이 승리를 거머쥔 현장


 

유난히 인상 깊었던 사진들이 있는데 대체로 70년대의 사진이었다.


존 폴 필로의 ‘켄트 주립대학 대학살’은 반전 시위를 하는 학생에게 향한 총은 공포탄이 아니라 실탄이었다는 설명과 함께했다. 실탄을 맞은 학생 옆에는 울며 소리치는 친구가 있었다. 총을 맞고 쓰러져있는 학생이 영화 소품으로 제작된 더미처럼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캠퍼스의 주인공은 학생이어야 하는데 캠퍼스에 드리운 건 폭력과 죽음이었다.


그리고 닐 올레비치의 ‘방콕에서의 만행’. 우익단체와 군경이 군부에 저항하는 좌익 학생들을 대거 사살하는 탐마삿 사건 당시의 사진이다. 이미 교수형에 처한 시신을 향해 누군가 철제 의자를 휘두른다. 처형이 끝이 아니라는 시신 유린의 현장에서 매우 어린 학생들이 웃으며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어떠한 폭력이 옳다고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번 사진전에는 시신을 다루는 한쪽의 상황이 잘 드러난 사진이 더 있었다. 시체를 끌고 다니며 짓밟는 모습에서 사람의 몸이 누가 밟는다고 움푹 파일 수 있나 비현실적인 모습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죽고도 뼈가 온전히 자리 잡고 있을 거라는 나의 온건적인 삶을 반영한 편협한 사고였다.


 


지난 10년간 우리에게 벌어진 일


 

마지막 퓰리처 사진전 관람이 2014년이었다. 10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동행자와 이야기하면서 예술의전당으로 향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과 코로나 외에는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전시를 보니 BLM 운동과 홍콩 시위 현장 등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아가려는 순간이 담겨있었다. 누군가는 그러한 시도를 억압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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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순간,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을 구하는 모습, 생명이 주는 어떤 울림, 그리고 온정과 악의. 이 모든 건들을 포착하고 고발하고 공유하는 사진기자. 뷰파인더 너머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전시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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