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공놀이클럽, 이지응
주말 아침, 아이는 부모님이 잠에서 깨기만을 기다린다. 이미 일어난 부모는 아이를 봐주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와 눈을 맞추는 대신 스마트폰을 보며 침대에 파묻혀 있다. 아이는 옆돌기도 해보고, 머리가 아프다고 꾀병도 부리며 관심을 끌지만 소용없다. 일주일 내내 일에 시달리느라 피곤한 맞벌이 부모에겐 아이 목소린 들리지 않는다.
거짓말은 점점 대담해진다. 아이는 집에 도둑이 들었고, 괴물이 나타났다며 소리친다. 그제야 헐레벌떡 뛰어오는 부모는 아이의 말이 거짓인 걸 깨닫고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한다. 아이는 또다시 소외된다. 외롭던 아이는 성인이 되고, 자취를 시작한다. 어릴 땐 그토록 애정을 갈구해도 모른 척했던 부모는, 독립해 삶을 꾸리며 사는 자식에게 툭하면 연락하며 숨통을 조여온다. 어른이 된 아이의 눈엔 이젠 부모가 괴물로 보인다.
연극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 네 번째 에피소드인 ‘제4의아해도_집 무섭다그리오’ 내용이다. 2026년 2월 9일 7시 30분 공연의 객석 대부분을 점유한 ‘어른’ 관객들은 무대 위 어린이 배우들을 처음엔 그저 귀엽게만 본 듯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까진 일부러 더 크게 웃고, 어린이 배우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던 객석 분위기는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주인공 소녀가 내 아이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을 수도, 혹은 무대 위 소녀가 ‘나’ 같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공놀이클럽, 이지응
궁금한 게 늘 많은 어린이는, 하고 싶은 말은 그보다 더 많다. 하지만 어른들은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린이들은 어른 말 잘 듣길, 재능을 빨리 발견하길, 일찍부터 열심히 살면서도 어른들의 이상향인 순수함만은 유지하길 바란다. 그런 통념에서 벗어난 어린이들에겐 말 안 듣는다, 버릇없다, 별나다 같은 낙인을 찍으며 교육이란 이름으로 길들이려 한다.
연극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는 어린이를 가르치거나 순수해지라고, 용감해지라고 강요하며 억지 교훈을 주지 않는다. 이상해도 괜찮고, ‘이상’에서 벗어나도 괜찮고, 무서운 게 많아도 괜찮고, 심지어 어른이 된 후에도 무서워해도 괜찮다 한다. 연극 필수 덕목인 동시대성은 물론 당사자성까지 확보해 낸 작품은 짜릿한 충격과 유쾌한 신선함을 선사했다.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는 1934년에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된 ‘이상’ 시인의 연작시 <오감도>를 모티브로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공동 창작한 연극이다. 어른이 어린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척하는 게 아닌, 어린이들이 전면에서 목소리를 내며 함께 만들어간 작품은 기존 어린이·청소년 극의 고정관념을 해체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무서워하며 도로로 질주하는 13인의 ‘아해’들이 나오는 이상 시 <오감도>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는 독자들의 항의로 연재가 중단됐다. 이상은 <오감도>로 ‘어떤 그림’을 완성하고자 한 게 아니라 ‘어떤 독자’를 만들고자 했다. 연극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의 강훈구 연출 또한 <오감도>의 ‘질주한다’는 시구를 그대로 인용해 배우들을 무대에서 질주하게 했다. 작품 프로그램북에 의하면, '가장 난해한 텍스트를 가장 투명하고 생생한 어린이의 언어로 풀어낸' 것이다.
사진 출처 - 공놀이클럽, 이지응
어린이·청소년·어른 배우들은 소리를 지르고, 질주하며, 무서워하는 것과 이루고 싶은 꿈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연기했다. 작품은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가정(부모들의 강요 혹은 방임)·학교(학교폭력)·사회(sns·유튜브·AI·외모지상주의·노키즈존·전쟁)의 다양한 문제를 고발하는 성격을 띠기도 했다. 스마트폰과 아이돌 산업을 풍자한 일곱 번째·여덟 번째 에피소드에선 영상 기법을 적극 활용하며, 자극적인 콘텐츠에 노출되는 어린이·청소년의 모습을 날카롭고 섬뜩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지나온 어른을 위로하기도, 혹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한 순수한 꿈을 응원하며 온기를 건네기도 했다.
2018년 창단한 영어덜트 연극의 대표주자인 ‘공놀이클럽’은 ‘공놀이하듯 연극한다’는 철학으로 배우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는 무대를 지향한다. 어린이극의 편견을 깨고 객석을 순식간에 몰입시키는 연출력과 ‘진짜’가 담긴 진정성은 탁월했다. 어린이·청소년 배우의 가장 리얼한 목소리가 담긴, 작품을 두 번 관람한 어린이 관객들에게도 큰 공감을 받은(프로그램 북에 7세·10세 어린이 관객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제11의아해도_노키즈존 무섭다그리오’가 그랬다.
열 번째 에피소드인 ‘제10의아해도_꿈 무섭다그리오’에서 어린이·청소년·어른 배우들은 현실적인 꿈(시험 성적·돈·결혼)을 이루고 싶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순수한 꿈을 꾸고 있었다. 동화 속 세상을 유영하듯 뛰고, 소리치는 배우들은 여러 개의 공을 객석으로 던졌다.
그러던 중 위험하단 이유로 공연은 중단된다. 어린이 배우들은 어떻게 공을 딱 3열까지만 던지냐고, 아기가 갖고 놀아도 될 정도로 말랑말랑한 공에 맞는다고 뇌진탕에라도 걸리냐며 논리적으로 항의하지만 소용없다. 연출과 현실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장면이 끝난 후, 어린이·청소년 배우들의 실제 목소리가 담긴 열한 번째 노키즈존 에피소드로 넘어갔다.
사진 출처 - 공놀이클럽, 이지응
가족이 무대에 올랐지만 어리단 이유로 객석 입장을 못 해 공연을 못 본 어린이,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다가 항의받은 어린이, 중학생은 스터디카페에 머물면 안 돼 환불도 못 받고 쫓겨난 청소년 등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한 그들의 목소리는 객석의 어른들을 반성하게 했다. 꿈 에피소드에서 노키즈존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연결성, 현실→꿈→다시 차가운 현실로 이어지는 장면 배치 자체가 메시지인 것까지. 작품은 치밀하게 설계된 대본과 과감한 현실을 번갈아 보여주며 연극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란 말을 증명했다.
우리는 모두 이상한 세상을 질주하며 살아가는 아해들이다. 솔직하고 대담했으며, 날카롭고 과감하며, 능청스럽기까지 했던 연극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는 모든 어린이이자 어린이였던 이들에게 말했다. 무서워하면서 질주할 필요는 없다고, 혹은 질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직도 무서운 게 많은 건 너만 그런 게 아니니 외로워하지 말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