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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결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은 언젠가 끝을 맞이하기에 더욱 귀하다는 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삶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과 상실을 실제 견뎌내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일상을 조금씩 무너뜨리며 삶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영화 《릴리와 찌르레기》는 어린 자녀를 잃은 한 부부가 그 무력감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견뎌내는 과정을 그린다. 아내 릴리는 일터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남편 잭은 정신병원에 들어가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던 어느 날, 릴리의 삶에 찌르레기 한 마리가 불쑥 날아든다. 애써 밀어내려 했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는 상실의 형상을 한 채.
애도의 첫 단계, 직면하기

릴리는 아이를 잃은 뒤 마트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삶이 거의 멈춰 있다시피 한다. 집에서는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낼 뿐, 살아가기보다 버텨내는 하루를 반복한다. 그런 그녀가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잡초가 무성해진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다. 엉켜 있던 풀을 뽑고 흙을 고르며, 다시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한 마리의 찌르레기가 나타나 그녀를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쫓아내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찌르레기는 번번이 되돌아와 그녀를 향해 날아들고 결국 릴리는 크게 다치기까지 한다. 이는 릴리가 그동안 외면하고 미뤄두었던 상실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살아보려는 마음은 다시 아파질 용기를 내는 일이기도 하다.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피하려 했던 상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으로 돌아가는 길과 상실을 마주하는 길이 결국 같은 선상에 놓여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상실을 대하는 모순적인 마음

릴리는 변화하려는 자신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찌르레기를 없애려 한다. 쥐약을 사고, 돌을 던지며 어떻게든 몰아내려 애쓴다.
하지만 막상 찌르레기가 다치자, 그녀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주저앉아 어떻게든 살려 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없애고 싶었던 존재였음에도, 막상 그것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누구보다 절박하게 붙잡으려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상실이 지닌 가장 복잡한 감정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고통은 사랑했던 존재가 내 삶에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붙들고 있는 마지막 흔적이기도 하다.
그 마음에는 서로 모순된 감정이 공존한다. 아픔은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그 아픔마저 사라지면 사랑했던 사람과의 연결까지 희미해질 것만 같아 선뜻 놓지 못하는 것이다. 애도란 그 모순을 지워내는 일이 아니라, 품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임을 릴리 역시 조금씩 깨달아간다.
나란히 헬멧을 쓰고 향하는 '수용'의 단계

아이를 잃은 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견뎌내던 릴리와 잭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온다. 그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아이의 이름을 마침내 부르고, 과거의 기억을 조심스레 나누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침묵으로 남겨두었던 상실을 비로소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보며 수용하게 된 것이다.
그 변화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나란히 헬멧을 쓴 채 정원으로 향한다. 언젠가 찌르레기가 또 날아와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더 이상 그 정원을 피하지 않는다.
헬멧은 상실에게 무방비로 삶을 내어주지 않을 만큼 단단해진 두 사람의 변화를 보여준다. 피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슬픔을 몰아내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변화.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가 건강한 애도의 단계를 밟아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