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그 장면을 간직하고 싶다 [영화]

상실을 벗어나기 위한 잔잔한 몸부림
글 입력 2023.08.08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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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의 장면을 간직하다 #2

 

밤의 광장, 명지와 현석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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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둥대는 대화


 

여자와 남자가 바르샤바에서 만났다. 이들은 추억을 함께 나누었던 한국을 벗어나 이국적인 곳에서 마주하는 것에 새삼 낯선, 그렇지만 적당히 유쾌한 감정을 느낀다. 조금 전까지 간단히 식사하고, 야외의 한 테이블을 차지해 맥주를 한잔하고 있다.

 

명지와 현석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길거리의 음악가가 감성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어쩌면 두 사람은 각별한 애정 관계에 있거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피곤해 보인다느니 공부는 재미있냐느니 참 표면적이고 따분한 이야기들뿐이다.

 

둘은 보기보다 거리가 꽤 있는 사이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들의 대화가 계속해서 마음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바깥을 부유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현석은 명지의 남편이자 자신의 옛 친구인 도경의 부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오직 명지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

 

명지의 마음은 도경을 잃은 후부터 쭉 닫혀 있다. 닫힌 마음은 현석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좀처럼 상대방인 현석에게 눈길을 고정하지 못한다. 대화의 주제도 중구난방이다. 유럽에 와서 ‘이곳은 생각보다 더 유럽 같다’는 황당한 말은 그가 이야기에 집중은 하지 않지만, 말을 하지 않았을 때 오는 공백이 싫어 아무 말이든 뱉고 본다는 것을 보여준다.

 

명지는 지금 몸부림치고 있다. 공백이 찾아왔을 때 느껴지는 상실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이 제법 긴 롱테이크는 명지가 (이 장면 내내 그와 현석의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길거리 가수에게 돈을 주는 행위로 마무리된다. 공교롭게도 현석이 도경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직후이다. 그리고 카메라의 위치가 전환되어, 이제 앵글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 남게 된다.

 

더 이상 그(관객)의 집중을 흐트러트릴 만한 것이 없다. 상실을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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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명지가 도경을 애도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어쩔 수 없이 바라보는 순간


 

이전 장면과 같은 테라스에서 이루어지는 이후의 대화에서, 현석은 명지에게 계속해서 도경의 이야기를 꺼낸다. 도경과 명지가 함께 행복했던 시절, 결혼을 앞두고 희망만이 가득했던 시절, 차가 없음과 옷에 묻은 보풀이 가장 큰 비극이었던 그 시절.

 

현석은 계속 도경의 상실을 일깨워 주고, 명지는 더 이상 상실을 회피할 수 없게 된다. 명지는 맥주를 한 잔 더 사겠다는 핑계로 카메라에서 사라지고 싶지만, 현석이 맥주잔을 낚아채 계산하러 가버려 다시 관객 앞에 홀로 남게 된다.

 

그리고 테라스 장면에서는 처음으로 바스트 샷이 나온다. 오랜만에 크게 마주하는 명지의 얼굴에는 이미 눈물자국이 있다. 상실과 고통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하면서 명지는 비로소 다시 관객에게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현석이 무슨 말을 하든 잔잔히 응답하던 그가 계속해서 도경에게 전화를 걸어 보자는 말에 처음으로 화를 내는 때이기도 하다.

 

명지의 고통이 풀리고 소강상태에 이르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지만, 그 해소가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원하지 않는 현실이 없는 체하다가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시점. 회피하고 분노하는 명지의 감정이 공감된다. 슬픔과 애도는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이 장면을 간직하고 싶다.

 

 

*이 글은 인디스페이스의 ‘비평가 지원 사업’을 통해 관람권을 지원받아 감상 후 작성한 비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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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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