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이 의무처럼 느껴질 때
대학교 팀 프로젝트를 할 때면 “좀 더 창의적인 의견 없어?”라는 말을 듣곤했다.
글을 쓰고 피드백을 들을 때면 “진부하다, 좀 더 신선하고 독창적인 것이 필요하다”라는 말 또한 들었다. 창의성은 새로운 아이디어=생각에 국한되지 않았다. 자료를 취합하고 만들 때, 보이는 시각적 요소또한 중요하다. 처음에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이 재밌었다. 그러나 반복되다 보니 남들과는 달라야 된다는 압박감이 내면에 생겼다. 내용의 깊이보다 ‘창의성 있어 보이느냐’가 평가 기준이 되는 순간,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나는 창희성을 발휘한다 기보단 창의적인 척 ‘포장’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새뮤얼 프랭클린의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는 바로 그런 내 경험과 감정을 날카롭게 되짚어준다. ‘창의성’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며, 묘한 위로를 받았다. 저자가 말하는 ‘창의성의 신화’는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쩌면 더 심각할지 모른다.

창의성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 않다
에밀리 웨스롤링은 이 책에서 오늘날 창의성이 어떻게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학교, 교육, 기업, 마케팅, 정책 슬로건까지 어디에서나 창의적이라는 말이 거의 마법처럼 쓰인다. 창의적 아이디어, 창의적 인재, 창의적인 리더십…….
문제는 그것이 실제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능력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 창의성을 인정받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 창의성을 펼치기 위해선 시간, 자원, 안정된 환경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예술 교육을 받고, 다양한 경험을 할 기회를 얻지만 누군가는 생계를 걱정하느라 기회 자체를 갖지 못한다. 결국 창의성 이면에는 ‘노력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환상 속에 불평등을 가린다.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를 읽으며 공감이 갔던 부분은 ‘창의성이 본질이 아니라 외형으로 평가받는 시대’라는 지적이다. 즉 창의성은 포장의 기술이 되기도 한다.
나 역시 발표 준비를 하며 아이디어의 깊이보다 화려한 디자인, 감성적인 스토리텔링, PPT 효과 등에 신경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그 안에 내가 말하고 싶은 진심은 흐려졌던 것 같다.
이 책은 창의성이라는 단어가 어느새 ‘기교’ 혹은 ‘연출’과 같은 말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한다. 진짜 창의성이란 낯선 문제에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고의 과정일 텐데, 지금의 사회는 그것을 이미지화하고 포장 가능한 스킬로만 바라본다. 결국 창의성은 ‘보여주는 기술’로 왜곡되며 진정성 없는 경쟁만 부추기기도 한다.
창의성의 피로를 내려놓는 시간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에서는 창의성에 대해 시대별, 상황별로 다양하게 정의 내린다. 19세기 초에 창의성은 예술가의 영역이었으나 1950년 대 심리학의 등장으로 측정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길포드는 IQ테스트처럼 창의성테스트를 개발해 교육과 군사, 전략에 활용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는 산업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실리콘벨리와 벤처 기업 중심의 기술 문화가 확산되며 경제 성장과 기업 경쟁의 핵심 자원으로 변화됐다. 그 결과 2000년대 이후에는 자기 계발의 도구, 성공의 기준점이 되었다.
책을 덮으며 나는 오래된 질문 하나를 다시 꺼내 들었다. “나는 창의적인 사람인가?” 예전 같으면 스스로를 부족하게 여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책은 말한다. 창의성은 절대적인 덕목이 아니며 모두에게 반드시 요구되어야 할 자질도 아니다. 저자는 오히려 ‘강요된 창의성’이 우리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책은 단순히 창의성을 비판하지 않는다. 창의성이 어떻게 계급화되고 상품화되며 우리를 지치게 하는지를 구조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창의성을 숭배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누가 기회를 얻고 탈락하는지를 조목조목 짚어낸다.
무엇보다 창의성이 어떤 시대 목적에 맞춰 정의되고 소비되어 왔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창의적 인간상’에 의문을 던진다. 창의성이 부족하다고 느껴본 사람, 늘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는 사람, 특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창의적인 삶도 좋지만 창의성에 지배당하지 않는 삶이 더 소중하다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눈에 띄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내 삶을 지키는 단단한 기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