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피곤하거나 지칠 때 쉽게 말한다.
"쟤랑 있으면 기 빨려."
"회의만 하면 진짜 에너지 다 빨려."
"요즘 인간관계 다 기 빨려."
그렇지만 나는 이 기 빨린다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다. 꼭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어도 말이다. 은연중에 나도 기 빨린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해버릴 때는 특히 더 그렇다. 그 이유는, 이 말이 너무도 쉽고 간결한 것에 비해 그 느낌은 생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방점은 '빨린다'는 표현에 있다. 마치 피를 뽑아먹는 거머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내 상태를 쉽게 '기 빨림'만으로 치환해버리는 것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내 감정의 원인을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한다. 마치 상대가 내 에너지를 빼앗아 간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내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생긴 감정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두 번째, 내 감정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다. 피곤하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지만, 왜 피곤한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상대에게 상상을 유발해 해석 노동까지 강요한다. 그러니, '비폭력 대화'의 관점으로 나를 표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비폭력 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 NVC)에서는 자기 책임의 언어를 지향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그리고 감정을 '내 욕구'와 다시 연결하라고 제안하며, 내 욕구를 찾아가는 방법을 4단계로 제안한다.
"나는 기운이 빠져서 지금 지쳤어." (관찰)
"지쳤어, 왜냐하면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 (느낌)
"지원받고 싶고, 나눠지고 싶다는 내 안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그래." (욕구)
"다음에는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부탁)
'비폭력 대화'라는 단어는 사실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 폭력이라고 한다면 누가 칼을 들고 싸우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등 물리적인 힘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왜 굳이 비폭력이라고 칭하는 걸까? 비폭력 대화를 창시한 마셜 로젠버그는 이 개념을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 간디의 '아힘사(Ahimsa)' 개념에서 가져왔는데,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단지 물리적인 공격을 뜻하지 않는다. 비난, 비교, 조종, 판단, 무시와 같이 개인의 인간성을 깎아내리고 관계를 단절시키는 모든 언어적 방식은 폭력에 포함된다. 로젠버그는 기존의 일상적 대화가 이미 충분히 폭력적이라는 자각을 주고 싶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너 왜 그래?"
"그러니까 너는 항상 문제야."
"쟤보다 넌 부족하잖아."
이러한 익숙한 폭력성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서 비폭력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비폭력 대화는 단순히 말투가 부드러운 게 아니라, 관계를 해치지 않는 대화법을 뜻한다.
관계뿐만 아니라 자아를 해치지 않는 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감정에도 '나쁜 감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화를 참고, 눈물을 참는다. 그렇지만 감정은 신호이지, 판단 대상이 아니다. 자아와의 비폭력 대화를 시각적으로 잘 구현한 영화가 바로 <인사이드 아웃>이다. 라일리의 머릿속엔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혐오가 '감정 조종석'을 통해 라일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 이 감정들은 타인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라일리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반응이라고 보는 게 맞다. 안전이 위협당하면 두려움이 운전대를 잡고, 공정함이 무너지면 분노가 폭주한다. 그리고 연결이 단절될 때면 슬픔이가 등장한다.
기쁨이가 그토록 존재의 이유를 잘 몰랐던 슬픔이의 역할은 '연결'이었다. 슬픔은 문제가 아니라 연결의 욕구를 감지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이다. 라일리는 슬픔을 제대로 표현함으로써 부모와 다시 연결되고, 회복해 성장이 가능했다. 비폭력대화 전문가 박재연 소장은 토크쇼에 나와 사람의 모든 말은 두 가지 중 하나로 나뉜다고 말했다. 부탁 아니면 감사라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말이 부탁도, 감사도 아니라면, 그 말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가리고 있는 건 아닐까?
<데드풀>의 맛깔나는 번역으로 유명한 황석희 번역가가 최근에 사람들의 요청으로 '다정한 번역'을 소셜 미디어에서 의뢰받아 올려준 적이 있다. 이를테면 "너 그럼 사람들이 무서워해."는 사실, "넌 그것보다 다정한 사람이야.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어."라는 뜻인 것이다. "하나하나 물어보지 말고 그 정도는 알아서 하세요."는 "싹수가 보이는 신입은 강하게 키우는 게 내 신조예요."라는 식이다. 그의 다정한 번역을 읽으며, 상상력이 풍부한 내 머릿속에 이 번역기를 꼭 장착하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외국어를 자주 틀리면 금방 고치려 노력한다. 반면 익숙한 한국어는 아예 틀린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가 기 빨린다고 말할 때, 진짜 전하고 싶은 건 아마 이런 말일 것이다.
나는 지금 너무 지쳐.
내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
실패할까 두려워.
언어는 감정의 거울이 아니라 번역기라는 생각을 해보며, 조금 더 신중하게 말을 하자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타인과 나 자신을 연결하는 언어를 더 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