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들었던 마지막 강의 시간,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여러분, 벌써 저희 강의가 13주차에 접어들었네요. 다음 주면 14주차이고, 그러면 우리가 만난 지도 100일 가까이가 되었단 말이죠. 예전에는 갓난아이가 태어나 100일을 넘기면 잔치를 열었고, 연인들도 100일을 넘기면 오래 간다는 속설이 있었죠. 많은 기술의 발달로 ‘100세 시대’라 불리는 요즘, 어쩌면 여러분은 100세를 훌쩍 넘는 나이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여러분에게 100일이란 어쩌면 아주 사소한 시간이겠지만,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다는 100일의 시간처럼,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얼굴을 맞댄 우리의 인연이 조금이나마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네요.”
오늘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 활동한 지 109일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에디터로서의 110일째를 맞이한다.
너무나도 해보고 싶었던 활동이었기에 1월부터 부지런히 자기소개서를 작성했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 탓에 마감이 임박할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고(완벽에 대한 강박이 있는 나에게는 늘상 있는 일…), 결국 마음이 조급한 상태로 어찌저찌 제출했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벌써 활동의 마무리가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 놀랍다.
이토록 시간은 야속하게 흐르기에, 우리는 바쁘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지난 시간 동안 남긴 우리의 발자국, 그리고 끈질기게 버텨낸 시간의 자취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어떤 글을 써왔고, 또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던 수많은 고민의 흔적들이 과연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을까? (곰이 사람으로 변할 만큼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겠지만) 분명한 건, 글을 쓰는 과정에서의 고민이 참 즐거웠고, 완성된 글을 바라보며 큰 뿌듯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오늘은 지금까지 기고한 총 16편의 글들 중, 유독 내 마음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던 몇 편을 돌아보며 다시금 회고해보고자 한다.
딸기와 낭만
Opinion 기고를 할 때, 다룰 수 있는 분야는 정말 다양하다. 가장 익숙한 도서, 영화, 공연 같은 주제부터 패션, 운동, 동물 등까지 폭넓다. 에디터 활동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다면, 바로 최대한 다양한 카테고리의 글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아주아주 행복했던 경험을 하게 되어, 3월 마지막 주의 글을 통해 이 다짐을 실천할 수 있었다.
자기소개 시간에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주저 없이 “딸기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대부분은 식사다운 음식을 기대했던 터라 내 대답에 살짝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딸기를 최애 음식으로 당당히 내세웠다.
그런 내게 ‘첫 딸기 따기 체험’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느덧 여름의 초입이 가까이 다가온 오늘에도, 그날의 달콤한 딸기 향이 아직도 문득 문득 코끝을 스치곤 해, 난 다시 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물론 맛있는 딸기 케이크도 좋지만, 귀찮음을 감수하고 떠났던 그 낭만적인 딸기 모험은 굳이 굳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작지만 확실한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딸기의 붉은 기억 구슬을 다시금 쓰다듬으며, 이번 여름엔 청량한 초록빛 기억 구슬을 만들러 또 한 번 떠나보고 싶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4837
시나브로 한 숨, 한 숨
생각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서, 나 역시 더 좋아하게 된 글이다.
아무리 개인의 의견이 중심이 되는 Opinion 글이라 해도, 내가 매주 기고하는 글은 이름이 알려진 언론사에 실리는 공식적인 글이다.
일기도 아니고, 개인 블로그에 남기는 사적인 일상글도 아니기에, 다른 이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면서도 나의 의견과 생각을 적절히 녹여내는 글을 쓰기 위해 항상 마음을 다잡고 있다. 그런 이유로 매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묻곤 하는데, 이 글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반응을 얻어 다시금 꼼꼼히 읽어보게 되었다.
육체와 정신 사이에서 좋은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한쪽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느 한쪽은 반드시 탈이 나기 마련이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에는 쉽게 지치고 짜증이 나기 쉬운데, 이럴 때일수록 '덥다'며 축 처져 있기보다, 먼저 육체를 잘 보듬어야 정신도 함께 상쾌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작년 여름, 나에게 그 '보듬는 방법'이 되어준 것은 바로 수영이었다.
어릴 적 배웠던 수영을 무려 5년 만에 다시 시작했기에 어색하고 조금은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역시 몸으로 직접 배우는 경험은 언제나 큰 깨달음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중학생 시절 부모님의 지원 아래 배웠던 수영이 단순한 ‘활동’이었다면, 성인이 된 후, 내가 번 돈으로 직접 수강 신청을 하고 배우기 시작한 수영은 그 출발부터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랐다.
스스로는 알아채기 어려웠겠지만, 스물두 살의 내가 수영을 통해 배운 것들은 어느새 시나브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기에 더욱 감사한 마음이다.
또다시 한 숨, 한 숨 무수한 일상을 헤엄쳐 나가다 보면, 어느덧 내 몸과 마음에도 수많은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경험들을 디딤돌 삼아, 다시금 넓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5307
불완전한 동그라미의 행복한 노래
이번 큐레이션의 마지막 글로 꼽은 글이다.
‘그림책’ 하면 흔히 어린아이들이 보는 책이라고 생각해, 아예 선택지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림책을 사랑한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세상 속에서, 빼곡하게 눌어붙은 활자들이 가끔은 숨 막히게 느껴지는 날이면, 상대적으로 가볍고 활기찬 그림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침대로 다이빙한다. 그것이 나만의 힐링법이다.
특히 많은 그림책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을 하나 꼽으라면, 쉘 실버스타인의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 쪽은』이 떠오른다. 단지 내용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이 책은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한 중요한 시험의 순간에 우연히 다시 마주한 기억과도 연결되어 있어 나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의 주인공인) 한 조각의 이가 빠진, 이 불완전한 동그라미는 조금 유별나다. 불완전하기에 오히려 행복하다.
그리고 이 동그라미는 영특하다. 자신의 불완전함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위한 조건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빠르게 굴러가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스스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그것을 누릴 줄 아는 모습이 참 멋지다.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모두에게 똑같은 행복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유한한 삶 속에서 자신에게 진짜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각자의 속도와 모습으로 행복한 동그라미처럼 둥둥 굴러갈 수 있기를 바란다.
p.s 『떨어진 한 쪽, 큰 동그라미를 만나』도 함께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5539
지나온 시간만큼 쌓인 글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뿌듯함이 밀려온다. 스스로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고 싶은 순간이다.
사실 학기 중 매주 한 편의 글을 써내는 일은 때때로 벅차고 힘들게 느껴졌다. 하지만 좋은 반응을 들을 때면, 혹은 내 글이 헤드라인에 오를 때면, 그 순간의 뿌듯함이 다음 글을 더 잘 써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다.
나의 은사님께서는 자기표현의 글쓰기를 ‘자기 치유의 과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 활동을 꾸준히 즐기며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비단 주위의 반응뿐만 아니라) 바쁜 일상 속에서 이 시간이 나만의 ‘치열한 휴식’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역설적이지만, 나는 이 글쓰기 시간을 통해 쉬어가며 나를 돌아보고 다독일 수 있었다.
‘글은 하나의 소망’이라는 말을 나의 자기소개 문구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글을 통해 나의 소망을 다시 바라보고 다시 되새기며, 현재를 밟아 미래로 나아가고 싶다.
앞으로도 손끝으로 소망을 써 내려가며, 나만의 길을 천천히 굴러가고자 한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