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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혹독한 추위를 간신히 견뎌낸 겨울이었기에, 왠지 올해 여름은 무난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보상 심리가 생겼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락가락한 봄날씨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심지어 3월 말에는 하늘에서 흰 눈과 꽃잎이 뒤엉켜 쏟아져 내리기도 했다. 평소 보기 힘든 풍경에 잠시 감탄했지만, 곧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모습일까 의문이 들었고, 속으로 ‘지구야, 미안해…’라고 중얼거렸다.


많은 기상 전문가들이 올해는 4월부터 여름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여름 더위에 유독 취약한 나는 그런 예측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는 달리,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언제나 대비가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다가올 여름을 내다보며 봄옷을 사는 일조차 망설이게 되었다.


대학생에게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꽃놀이 가기 딱 좋은 날씨가 되자 어김없이 중간고사가 찾아왔다. 눈앞에 닥친 시험을 정신없이 치르고 나니, 봄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것 같은데, 어느새 만개했던 벚꽃의 자리는 푸르른 잎새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사람들의 옷차림과 도서관 열람석 위에서 내려오는 에어컨 바람을 맞고 있자니, 드센 여름의 기세가 벌써부터 스멀스멀 느껴지는 듯했다.


누군가 “여름이 싫어? 겨울이 더 싫어?”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여름을 택한다. 모든 것을 녹여 흘러내리게 할 듯한 쨍쨍함과 끈적함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겪어보지 못한 이글루 속으로 숨어들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여름 무서워 인간’인 나에게도, 여름이 되면 기다려지는 것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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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도 더위에 지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작고 아기자기한 자취방은 여름만 되면 어쩜 그렇게 답답하고 비좁아 보이던지, 종강을 하자마자 곧바로 본가로 내려가 시간을 보냈다.


내 고향은 대구. 고유한 분지 지형으로 인해 ‘대프리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강력한 더위로 유명한 도시다. 답답한 자취방을 피해 내려간 고향의 날씨는 역시나 대단했다. 의도치 않게 집콕 생활을 하던 도중, 무기력해진 몸에 시원한 에너지를 불어넣고 싶은 충동이 들었고, 결국 집 근처 수영장에서 열리는 수영 강습에 신청했다.


수영이라는 스포츠의 특성상,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어디서나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보니, 강습 신청은 늘 쉽지 않다. 중학생 이후 처음 받는 수영 강습이라 과연 물에 뜰 수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인원수가 남은 반이 고급반뿐이라 어쩔 수 없이 반강제로 그곳에 등록하게 되었다.

 

첫 수업 시간 전, 몸을 풀기 위해 일부러 한 시간쯤 일찍 수영장에 도착해 자유수영을 시작했다. 강습 등록 후 걱정 인형이 되어 있던 내게, ‘어릴 때 몸으로 배운 것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엄마의 말씀이 정확히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내 몸은 생각보다 익숙하게 물에 적응했고, 물속에 푹 담긴 채 온몸으로 퍼지는 시원한 감각이 오히려 낯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팔을 돌리며, 두 다리를 쭉 뻗어 물을 젓는 수영은 온몸의 힘을 사용하는 운동이다. 내 몸 하나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물속에서는 달릴 때와 달리 저항력이 생겨 움직임이 더욱 어렵다. 게다가 다른 수강생들과의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고, 물의 저항을 줄이는 일은 단순히 물에 뜨는 것과는 또 다른 고비였다. 매번 숨이 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에 뜨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면, 막상 뜨고 나니 바로 그다음 고민들이 연달아 생겨났다. 그런 고민들을 해결하고 싶어 두리번거리던 와중, 하나의 책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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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조용히 메워주는 콘텐츠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좋은 플레이리스트를 배경 삼아 틀어놓기도 하고, 재미있는 팟캐스트에 귀를 쫑긋 기울이며 밀린 집안일을 조금이나마 즐거운 마음으로 해보려 한다. 그러던 중, 알고리즘이 유튜버 이연 님의 콘텐츠로 나를 이끌었고, 그렇게 우연히 그의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현재 약 95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대형 유튜버지만, 왁자지껄한 콘텐츠보다 고요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점이 그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평소에도 관심 가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삶의 맥락을 알고 싶은 마음이 드는 편이다. 이런 성격 탓에, 책을 읽을 때에도 작가 소개글은 꼭 챙겨 읽는 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유튜브 영상뿐 아니라) 유튜버 이연 님의 삶의 궤적이 궁금해져 검색하던 중, 그가 지필한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림 유튜버답게 만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었고, 자신의 어둡고 막막했던 시절에 시작하게 된 수영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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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영에 푹 빠져 있던 나는 무언가 이끌리듯 곧바로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빌렸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법이라고 하던데, 그 말처럼 이 책은 내가 몰입하고 있는 수영 생활이 잘 드러나 있어 금세 빠져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 레인에서 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팔을 한 번 저을 때마다 수영장 바닥의 타일 하나하나를 퀘스트 깨듯 지나간다고 상상하라’는 내용에, 그 다음 날 수영장에 가서는 정말로 타일을 유심히 바라보며 헤엄쳤던 기억이 난다. 이 구절 덕분에, 매초마다 내가 하는 동작에 최선을 다해 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수영이 한층 더 뿌듯하고 즐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억울하게도, 인간은 삶의 가치를 모를 때 가장 귀한 시간을 살게 되어 있다. 삶도 수영과 같을까? 저항을 줄이면 편하게, 멀리 갈 수 있을까?"]


수영을 하면서 매번 느끼는 점은, 삶과 수영이 참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물속에서는 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저항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팔을 저을 때마다, 다리를 위아래로 흔들 때마다, ‘이런 저항이 없어진다면 훨씬 더 쉽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구절을 읽고, 다시 한번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저항이 없다면 훨씬 편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방식으로는 결국 멀리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인생은 장기 마라톤이야!”라는 말처럼, ‘멀리’ 나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심이라 생각한다. 무엇이든 쉽게 나아가는 일은 즐겁고 아쉬울 것 없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짧게 끝나기 쉽다.


지루함과 고단함을 이겨낸 사람만이 결국 인생이라는 깊고 드넓은 물 속에서 진정한 저항을 줄일 수 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멀리 나아가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헤엄칠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유난히 다양한 예체능 활동을 배우며 자라온 것 같다. 당시에는 그런 활동들을 즐긴다기보다는, 마치 학습의 일환처럼 ‘반드시 버텨내야 하는 과정’이라 여긴 적이 많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성실히 견뎌낸 그 어린 날의 시간들이, 지금의 내 삶에 있어, 삶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크고 든든한 무기가 되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을 하나씩 열어가는 일과 같다. 평소 익숙하게 지나치던 도로도, 면허를 따기 전까지는 그 안에 ‘도로’라는 또 다른 세계의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배움은 그렇게, 숨겨진 세계를 하나씩 발견해 나가는 즐거움과 능력을 선물해준다.


물론 수영장에는 도로처럼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물속을 가로지르며 나만의 동력으로 나아가는 경험은 나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파란 세계 속에서 고민하고 애썼던 시간들, 그렇게 몸에 익혀진 자세들은 언젠가 마주할 또 다른 세계 속에서도 나를 버티게 해줄 단단한 무기가 되어줄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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