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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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지난 월요일, 국립현대미술관을 다녀왔다. 요 며칠 새 서울은 이상하리 만치 주말마다 비가 내렸다. 유난히 얄궂은 비 탓에, 나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과제만 잔뜩 해치우는 주말을 벌써 2주째 보내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심신은 지쳐 있었고, 주말 특유의 여유로움을 만끽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괜스레 억울해졌다. 그래, 어차피 도서관에 있을 거라면 마음 단단히 먹고 더 집중해서 과제를 끝내고, 대신 공강 시간을 틈타 월요일 낮 (남들이 일하는 한낮)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묘하게 짜릿한 선택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는 여전히 반가웠고, 비가 갠 뒤의 맑고 상쾌한 날씨는 우리의 발걸음을 한층 가볍게 만들었다. 함께 먹은 브런치는 소문대로 ‘느.좋’했고, 우연히 마주친 커다란 장미는 역시 꽃의 여왕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다. 초록이 우거진 돌담길을 따라 산책하다 도착한 곳은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친구가 오래 전부터 가고 싶어 하던 ‘론 뮤익 전시’였다.

 

기대에 찬 친구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 설렘이 어느새 나에게도 옮아오는 듯했다. SNS에서 몇 차례 스쳐 본 전시의 모습들로 인해 약간은 무덤덤해졌던 내 감정도,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실물로 마주한 전시 작품들은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었다. 현실 같지 않은 스케일과 기묘한 정적, 전시장을 뒤덮는 비일상의 범람에 나는 그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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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MMCA)과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 공동 개최한, 한국 최초의 론 뮤익 개인전이다. 1958년 멜버른에서 태어나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그는 지금도 자신만의 철저한 예술 세계를 왕성하게 펼쳐가고 있다.


경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그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나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익숙한 일상 속 순간들이 오히려 가장 비일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는 단순히 인체의 해부학적 디테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육체라는 물질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미묘한 눈빛 속 혼란스러움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그의 능력을 몸소 느끼고 있자니, 가히 대단한 예술가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마스크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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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장의 첫 작품으로, 그의 세 점의 마스크 시리즈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언젠가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에서 본 적이 있을 지도 모른다. 엄청난 크기로 눕혀진 사람의 머리를 마주하면, 비현실적인 센세이셔널함에 놀라 누구나 헉- 하고 숨을 들이킬 것이다.


론 뮤익은 실제 크기의 조각을 만들지 않는 작가로 유명하다. 이 작품 역시 실제 크기의 4배에 가까운 크기로 제작된 론 뮤익의 자화상이다.


몇 초간 거대한 크기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잠시 곤히 눈을 감고 잠든 듯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엄청난 디테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코 옆의 붉은기, 살짝 벌어진 입, 듬성듬성 하관을 뒤덮은 깎인 수염을 보고 있자면, 비현실적인 크기를 잊고 마치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론 뮤익을 실제로 마주한 듯한 느낌이 든다.


감긴 눈꺼풀 아래에서 그는 무엇을 꿈꾸고,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잠시 발걸음을 돌려 작품의 뒷편으로 가보면, 완전한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그저 텅 비어 있다. 즉, 얇은 곡선형의 마스크와 같은 껍데기일 뿐이다. 첫 순간, 엄청난 크기의 비현실성에 놀랐고 생생한 표현에 잠시나마 현실처럼 보였던 이 마스크는 다시 돌아와 곧바로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각성시킨다.


인간은 눈, 코, 입의 형상을 갖춘 사물만 보아도 인간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특히 이처럼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마치 잠든 듯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하나의 인간으로 착각하기란 어렵지 않다. 감긴 눈 아래, 감추어진 내면 세계를 잠시나마 궁금해했던 것이 억울하게 느껴질 만큼 초라한 마스크는 ‘껍데기란 무엇인가’, ‘인간의 겉모습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곱씹게 만든다.

 

 

 

나뭇가지를 든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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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전시 설명을 보고 나서 가장 마음이 가는 작품이었다. 앞선 작품에서는 머리 하나가 사람 한 명의 크기와도 같았다면, 이 여인은 매우 작은 크기로 표현된다. 이 작은 여인은 자신의 상체만큼이나 큰 나뭇가지 더미를, 허리 뒤쪽 살이 몇 겹씩 접힐 정도로 힘겹게 들고 있다.


그러나 매우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딱딱하고 곧은 나뭇가지들과는 달리 그녀의 허리는 유연한 곡선을 그린다. 그래서 부러지지 않는다. 뒤로 한껏 휘어진 그 허리는 언젠가 다시 꼿꼿이 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회복력을 지닌 스프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지만 단단한 두 다리로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부러지지 않는 그녀의 등은, 그녀가 무엇이든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는 멋진 여성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침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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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앞에서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뛰어들고만 싶은 푹신한 베개를 베고, 거대한 산처럼 펼쳐진 이불 속에 누워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은 다시금 관람객을 압도한다.

 

작품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론 뮤익 조각의 핵심적 특징을 모두 담고 있다. 과장된 크기, 실제 사람과도 같은 생생함… 관람객들이 작품을 경험하는 방식 역시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개인적으로는 살짝 눌린 팔뚝살이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조각상이지만, 과장된 크기는 끊임없이 비현실성을 일깨우기에,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듯한 어질어질한 감각이 든다.


<마스크 II>에서 감긴 눈 아래의 내면 세계를 궁금해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침대에 누운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 끝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게 된다. 턱을 괴고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녀는 과연 무엇에 그리 골몰하고 있을까. 그녀의 모습에 비추어, 나 또한 내가 골몰하고 있는 나만의 세계를 되짚게 된다. 그 상상이 순간적으로 날개를 달고 머릿속을 활개치며 퍼져나간다.


관객은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그녀는 마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먼 곳을 바라본다. 우리의 존재가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듯한 그 느낌은 오히려 묘한 안도감을 준다. 덕분에 관객은 작품 속 인물의 생각을 조용히 관찰하고 천천히 상상해볼 수 있다.

 

["관객은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그녀는 마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먼 곳에 시선을 둡니다. 우리의 존재가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안도감이 듭니다. 덕분에 관객은 작품 속 인물의 생각을 천천히 관찰하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인상 깊었던 작품 설명이다. 내가 아무리 (라인의 허용 한도 내에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도, 그녀는 결코 시선을 나에게로 옮기지 않는다. 그녀의 바로 옆에서—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도—나의 존재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마치 내가 우주 속을 떠도는 먼지 같은 존재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나를 오히려 아주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치킨/맨


 

가장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 작품이다. 긴 사각형 테이블을 두고 노인과 닭은 대치 상태에 있다. 이 작품을 바라보다가 친구가 읊조린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왠지 할아버지가 지고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 서사를 품고 있는 듯한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설명도 제공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낸다. 서사가 비어 있음으로써, 보는 이의 상상 속에서 서사는 더욱 풍부하게 채워진다.


닭과 할아버지 사이에 놓인 테이블은 마치 둘 사이의 안전거리처럼 보이지만, 그 대치 상태에서는 오히려 아찔한 긴장감이 감돈다. 관람자는 둘 중 누군가의 편이 되어볼 수도 있고, 혹은 심판자의 시선으로 이 상황을 지켜볼 수도 있다. 시점에 따라 눈앞의 이야기는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앞선 작품들과 달리, 이 일촉즉발의 상황 앞에서는 내가 한 발자국만 움직이거나, 작게 숨소리만 내도 두 인물의 시선이 곧장 나에게 꽂힐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마치 긴장감의 줄이 ‘딱’ 하고 끊어지면 그 즉시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이 작품 앞에서는 행동 하나조차 조심스러워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상황이 단순한 대치가 아닌 관계의 또 다른 형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닭을 케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외로운 삶 속에서 닭은 유일한 말동무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이 팽팽한 대치는 애정 어린 잔소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작품 설명은 이러한 모든 해석을 넘어 또 다른 시선을 제시한다.

 

["…아니, 어쩌면 닭은 단지 노인의 편집증이 만들어낸 환영인가요?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이 장면을 원하는 만큼 곱씹을 수 있지만, 상황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젊은 연인


 

두 남녀가 가까이 몸을 밀착하고 있는 모습은 은밀한 사랑의 속삭임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여성은 주눅들어 있는 듯 보인다.


작품의 뒤편으로 이동해 보면, 남성의 크고 무거운 손이 여성의 손목을 꽉 쥐고 있다. 이 둘은 정말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이기만 한 걸까?


단 한 걸음, 시선을 조금만 옮기는 순간 작품의 전혀 다른 이면이 드러난다는 사실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같은 장면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 이처럼 시선과 각도의 다양성은 타인의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며 읽어내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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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파란 수영복을 입은 금발의 소녀. 곧게 뻗은 두 다리와는 달리, 두 팔을 뒤로 숨긴 채 벽에 기대어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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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크기로 확대된 자신의 형상이 모든 관람객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소녀 스스로도 의식하는 듯, 그녀는 시선을 회피하며 부끄럽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몸의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수영복은 그런 감정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갑작스럽게 커져버린 몸에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성장이라는 것은 늘 당혹스러움과 통증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그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그녀는 마치 유령처럼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말해주고 싶다. 그 흐릿한 정체성은 곧 무한한 가능성의 다른 말이라고.

 

지나간 소녀 시절의 나에게도 그러한 당황스러움과 어색함, 부끄러움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에, 굳이 감추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쇼핑하는 여인


 

‹쇼핑하는 여인›은 2002년 작 ‹임신한 여인›, 2004년 작 ‹엄마와 아이›와 함께 ‘어머니 연작’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을 보고 나서야, 론 뮤익이 얼마나 보편적인 주제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진지하게 다루는 작가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두 팔 가득 생필품이 담긴 무거운 쇼핑바구니를 들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릿하게 만든다.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두 어깨가 함께 내려앉는 듯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의 양손을 덜어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다.


작품 제목만 본다면, 예쁜 옷과 장신구로 가득 찬 쇼핑백을 들고 경쾌하게 걸어가는 젊은 여성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상상을 한 것이 미안할 만큼 지쳐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작품 앞에 멍하니 서 있다 보면, 자연스레 나의 어머니가 떠오른다. 긴 세월을 묵묵히 감내하며 가족을 위해 살아온 그녀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밀려온다. 이 조각상은 단지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억 속 어머니를 닮아 있다는 점에서 관람객들에게 공통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매스


 

론 뮤익의 전시는 끝없이 관람객을 놀라게 한다. 그중에서도 한 전시 공간을 빼곡히 채운 두개골들의 나열은 단연 압도적이다. 기괴하고 충격적인 동시에, 그 스케일 앞에선 자연스레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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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점은, 전시 장소에 따라 배열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위로 쌓아올린 탑처럼 구성되어, 공간 자체를 장악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같은 오브제들이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배열된 순간 또 하나의 다른 작품이 되어, 한국의 관람객들에게만 특별한 시공간의 경험을 허락한다. (이러한 점에서 더욱이 놓치지 말아야 할 전시이다!)


두개골 하나하나는 개별적인 죽음의 표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작품명이 암시하듯, 그것들은 동시에 ‘mass’, 즉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 혹은 역사적 장면의 집합처럼 다가온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오브제, 인간의 형상 그 자체이면서도, 우리가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고 싶어 하는 (외면하고 싶어지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점에서 강렬한 역설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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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걸음 물러나 차분히 바라보고 있자면, 이 형상들은 단순한 공포의 대상만은 아니다. 두개골 하나하나가 품고 있을 수많은 이야기들, 그 개인들의 서사를 넘어서는 역사적 기억과 공동체에 대한 추모의 가능성까지 — 상상은 꼬리를 물고 확장된다. 그 과정에서 죽음이라는 막막한 개념은 어느새 바로 곁으로 다가와도 그리 낯설지 않다. 어쩌면, 그것이 이 작품이 지닌 가장 조용하고도 깊은 울림일지도 모른다.

 

 

 

론 뮤익: 인생 극장


 

전시를 다 보고 난 후, 마지막에 마련된 작은 공간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전시를 보고 난다면, 마치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 속 고단한 순간들을 훑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조각품을 통해 인간 존재와 삶의 기묘함을 마주한 후, 관람객들의 더욱 풍부한 감상을 위해그것을 조용히 곱씹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 공간에는 8개의 주제로 구성된 그림책들이 비치되어 있다. 차분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조각 작품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무심히 흘러가던 일상 속에서 내가 놓치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감정들과 생각들을 다시금 붙잡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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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러 작품들을 관람하고 있자니, 육체와 정신의 이어짐에 기묘함을 느끼면서 그 둘의 상대적인 크기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스스로 되물을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4월 11일부터 7월 13일까지 이어진다. 론 뮤익의 생생한 조각을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는 이 귀중한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일상의 틈에서 그의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비일상의 기묘한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자. 그리고 전시장을 빠져나온 그 순간, 우리는 어쩌면 비현실보다도 더 기이한 현실의 모호함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함을 일깨우는 뮤익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다시금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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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하나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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