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DF25] 메인포스터.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1/20260120194511_wngfsruw.jpg)
겨울의 한복판,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며 나는 순간적으로 시공간이 이동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웅장하게 솟아오른 백색의 고딕 양식 건축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성당 같은 외관은 마치 유럽의 어느 거리에 서 있는 듯한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숨을 골랐다.
그렇게 나는 지난 1월 11일, '원더랜드 페스티벌 2025(Wonderland Festival 2025)'의 문을 열었다. 매 시즌 '프리미엄 음악 축제'로서의 정체성을 다져온 이 페스티벌은 이번 겨울, 한 해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아 더욱 깊어진 라인업으로 돌아왔다. 특히 야외가 아닌, 사운드와 연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 평화의 전당이라는 실내 무대를 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차가운 공기를 뚫고 들어선 그곳에는 이미 따스한 하모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의 포문을 연 것은 배우들의 다채로운 매력이었다.
공연의 초반, 배우 정욱진은 뮤지컬 '어쩌다 해피엔딩' 속 로봇 올리버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객석을 무장해제 시켰다. 하지만 그저 '귀여운 배우'라고 단정 짓려던 찰나, 그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내며 공연장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제가 하는 공연을 한 번도 빠짐없이 다 보러 오셨거든요. 아버지가 경희대 출신이셔서, 이곳에서 노래하면 꼭 보고 계실 것 같아요. 참 좋아하실 것 같고요." 그는 무대 위 조명, 그 별 하나를 아버지라 생각하며 부르겠다며 별과 관련된 노래를 이어갔다. 마냥 해맑아 보이던 그의 미소 뒤에 자리 잡은 깊은 그리움과 철학, 그리고 진지한 면모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반전 매력을 넘어, 한 인간이 가진 삶의 무게가 음악으로 승화되는 찰나의 감동이었다.
이어 등장한 이봄소리 배우가 맑고 고운 음색으로 노래하다 돌연 폭발적인 록(Rock) 스피릿을 뿜어내며 관객을 충격에 빠뜨린 뒤, 무대의 열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그 열기 속에서 '킹키부츠'의 '랜드 오브 롤라(Land of Lola)' 전주가 울려 퍼졌다. 차지연 배우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강렬한 '블랙 롤라' 그 자체였다. 그녀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단순히 '멋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넘치는 개성과 카리스마로 무대를 휘젓는 그녀의 모습은 관객의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압도적이었고, '차지연'이라는 장르가 왜 독보적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미쳤다'라는 말 외엔 형용할 수 없는 에너지, 차지연 배우가 있었다. 그녀의 허스키한 음색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공기 자체를 진동시키며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을 부를 때, 그녀는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무대에 섰다. "이 노래는 하이힐이 필요 없습니다"라는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 치장이나 가식이 아닌 오직 진심으로 노래하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차지연 배우는 무대에 대한 예의가 남다른 사람이었다.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으며 곡마다 분위기를 달리하는 정성, 헤드윅 넘버를 부를 때 무릎을 꿇고 토해내던 카리스마와 터프함은 관객인 나에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티스트가 무대를 대하는 마음이 그토록 진심이니, 그 감정이 관객에게 닿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화려한 퍼포먼스가 끝난 뒤, 마이크를 쥔 그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많은 무대에 섰지만, 여전히 이 무대가 너무 그리웠고 관객 여러분이 보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대 하나하나가 더 소중해집니다." 최정상의 위치에 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목마르고, 여전히 감사해했다. 화려한 '롤라'의 가면 뒤에 숨겨진, 무대를 향한 그녀의 겸손하고도 간절한 태도는 노래만큼이나 긴 여운을 남겼다.
김광석의 '그날들'을 부를 때의 성량과 감성은 또 어떠했나. 공연 말미, 그녀는 "새해에는 모두가 편안했으면 좋겠다. 내가 있고, 너가 있는, 그래서 우리가 함께 잘 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미 최정상에 오른 배우임에도 "나는 완벽하지 않다, 더 열심히 하겠다"라고 말하는 겸손함에서 나는 진짜 어른의 품격을 보았다. 문득 오디컴퍼니를 비롯한 제작사들이 그녀에게 남자 역할을 맡기는 혁신을 감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보여준 깡과 에너지라면 그 어떤 남자 배우보다 더 남자답고 멋지게 배역을 소화해낼 것이라 확신한다.
뒤이어 등장한 '오페라의 유령'의 살아있는 전설, 라민 카림루(Ramin Karimloo)는 왜 그가 세계적인 클래스인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는 이번 무대에서 '오페라의 유령' 넘버를 절반 이상 소화하며 팬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록 발성과 성악 발성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그의 목소리는 웅장하면서도 힘이 넘쳤고, 때로는 소름 돋을 만큼 부드럽게 강약을 조절하며 관객을 홀렸다. 유령 특유의 끈적하고 질척이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감성을 이토록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가 부른 'Till I Hear You Sing'은 유령의 절절한 사랑과 추억, 그리고 강렬한 로맨틱함을 객석에 흩뿌렸다.
특히 그가 기타를 메고 노래하던 순간은 뇌리에 깊이 박혔다. "세상 모든 게 변해도, 내 숨이 멎어도 변하지 않는 건 바로 그대"라고 노래하는 그의 로맨틱한 목소리는 시린 겨울바람마저 녹이는 듯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태도였다. 듀엣 무대 후 언제나 파트너가 먼저 박수받도록 배려하고 돋보이게 해주는 훌륭한 애티튜드에서 거장의 여유가 묻어났다. 그와 함께 호흡을 맞춘 소프라노 손지수 배우 역시 멋진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성악과 오페라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라민과 손지수가 만들어낸 듀엣은 거장들의 만남이 주는 벅찬 전율 그 자체였다. 숨이 멎을 것 같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공연장을 나서며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인간에게는 왜 음악이 필요한가. 그것은 기쁨과 슬픔, 용기와 벅참, 후회와 성장이라는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뮤지컬을 사랑한다. 그 안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심장이 뛰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평화의 전당이라는 공간 안에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사람의 삶이 담긴 이야기 속에서 나 자신을 마주했다.
비록 티켓값이 저렴하지 않은 뮤지컬이지만, 원더랜드 페스티벌은 그 이상의 가치를 선사했다. 다양한 배우들의 무대를 한자리에 모아 다채롭게 향유할 수 있었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악, 그리고 훌륭한 태도를 가진 아티스트들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렸다. 이 공연이 앞으로도 계속되어 뮤지컬이 더 많은 사랑을 받고, 관객들이 다양한 음악과 배우들을 만나는 가교가 되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25년의 시작, 원더랜드가 선물해 준 그 '꿈같은 순간(Step into a dreamlike moment)' 덕분에 나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충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