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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배려와 오지랖 사이의 거대한 공백


 

봄을 맞아 새 옷을 장만하려 패션 콘텐츠를 뒤적거릴 때 가장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조언이 하나 있다. “사람들이 어떤 계절감의, 어떤 디자인의 옷을 입는지 살펴보세요.” 이것만큼 내게 어려운 일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남들의 옷가지 따위에 큰 관심이 없으니까. 아니지, 바르게 정정하겠다. 나 자신에 관한 일이 아니라면 사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는 흥미가 없다.

 

요즘은 누구나 그런 것 같다. 공공장소에서도 퍼스널 스페이스는 암묵적이고 분명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때 누가 말을 걸어오거나, 내가 하는 일에 은근히 곁눈질을 보이는 것이 두근거리기보단 불편한 것이 우선이다. 과거 시절처럼 다 같이 어울리는 공동체 생활을 강요하거나 학연·지연·혈연을 따지는 것이 고리타분하다는 것도 보통의 의견이고. (물론 여전히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는 것 같다) 지금껏 좋은 것으로 여겨져 개인의 영역을 간섭해왔던 ‘오지랖’이라는 것에 모두가 진저리를 느꼈고, 그 반작용으로서 무심한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가설 중 하나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개인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어색하던 우리 사회가 순식간에 뒤바뀌어 이런 모습이 된 것은, 그러니까 자기 일이 아니라면 타인에게 순간의 관심, 혹은 시선조차 붙이기를 망설이는 개인주의가 만연해졌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운 일 같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에게 말을 걸기 어려워하는 태도는 누군가의 고립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가벼운 말 걸기의 순간을 점차 포기하다 보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타인이 이방인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은, 자기의 어려움을 꺼내지 못하고 무표정으로 감추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영원히 떠도는 이방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지닌 약점, 혹은 실수를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을 책에서 보았다. 18세기, 견딜 수 없는 격정과 고뇌로 괴로워하다 떠나간 이방인 베르터에 이어서 20세기 동독에서 태어난 ‘새로운’ W를 알게 되었다. 이 어리고 외로운 이방인을 잠시 무대로 모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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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W의 ‘새로운’ 슬픔


 

20세기에 여러 문제아들이 있었지만, 그중 온건한 축에 속하는 한 명을 소개하자면 그는 구동독 소도시 미텐베르크 출신의 17살 학생 에드가 비보다. 어머니가 교장으로 있는 직업학교의 충실한 학생이었던 그는, 학교에서 사고를 일으키고 베를린 외곽으로 가출하였다가 4개월 만에 주검으로 밝혀졌다. 사인은 감전사. 베를린 신문의 부고 기사로는 미숙한 청년이 무허가 오두막에서 기계 제작에 몰입하다가 헛되이 죽어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돌연 부랑아로 돌변한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어머니는 죽음 이후에야 시신으로 돌아온 아들을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본성을 드러낸 반항아, 부랑아, 문제아, 에드가 비보는 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무엇이 그를 죽게 만들었는가? 감전사로 정리되는 그의 사인 이면의 비밀을 이야기는 털어놓는다.

 

*     *     *

 

직업학교의 모범생으로 살아오던 에드가 비보에게는 남몰래 끙끙 앓던 고민거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인데, 그중 하나가 비행(非行)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야말로 가출의 이유라는 것이다. 그를 향한 오해와 매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원판을 다듬는 문제로 친구 빌리가 플레밍 선생님과 갈등을 빚자, 에드가는 충동적으로 그 사이에 끼어든다. 그를 향해 선생님은 이렇게 소리친다. “비바우!” 자신의 위그노 교도식 이름인 ‘비보Wibeau’를 ‘비바우’라 부른 것에 당황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원판을 떨어뜨렸고, 선생님은 발가락을 다치고 말았다. 부상을 입고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 선생님은 그가 자신에게 덤비며 원판을 던져버렸다고 잘못 기억하였고 그 소식은 해당 학교의 교장인 에드가의 어머니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어머니는 착실한 모범생이던 아들이 학교와 선생님의 규칙에 반항하고 심지어 상해까지 입혔다는 사실에 한탄하였고, 그길로 집을 떠난 아들을 내버려두었다.

 

이러한 과정을 털어놓으며 에드가는 침착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를 정든 고향에서 퇴출되듯 떠나게 만든 것은 혹독한 몰이해에 있었다. 플레밍 선생님의 발에 원판을 떨어뜨린 사건과 관련한 그의 성 ‘비보’는 독일에 정착한 위그노 교도(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칼뱅파 교도)를 지칭하는 프랑스식 이름이다. 위그노 교도는 16세기 초부터 정부의 탄압을 받아왔고, 가톨릭과 대립하는 등 신앙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이름에서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정체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조롱받거나 거부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늘상 지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우한 역사를 지닌 비보라는 성이 비바우라 불린 것은 자신을 향한 조롱 혹은 비난으로 해석되었고, 개인으로서 존중받고 싶은 욕구와 자부심이 좌절된 순간이었다. 열등감을 건드리는 말 한마디에 힘이 쭈욱 빠졌을 에드가를 어째서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심지어는 이러한 전사는 알려 하지도 않고 모범생 아들이 사고를 일으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자신을 연민하느라 아직 어린 아들의 심정을 헤아려주지 못한 어머니는 또 어떻고! 나이가 어리고,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아이는 주위의 어른이 제일의 가치다. 그들에게 인정받는 것으로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그곳에 발붙이며 살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는 어른인 어머니와 선생님의 오해로 인해, 그는 지금껏 쌓아왔던 신뢰를 모두 잃어야 했다. 고향 미텐베르크는 더 이상 그에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 어른들의 세계와 규칙에 충실히 따르고, 모범생 아들을 요구하는 어머니의 가혹한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을 충동질하는 일탈의 순간을 완강히 거부해 왔건만, 에드가 비보는 한순간의 실수로 자신의 유일한 세계에서 축출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어린 소년 에드가 비보는 가장 친숙한 장소이자 고향에서 이방인이 되어, 또 다른 미지의 도시로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어른들의 일방적인 매도를 홀로 삼켜버리고는.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에드가는 친구 빌리의 아버지가 소유한 베를린의 철거 예정 오두막으로 가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베를린은 연고가 없는 도시였지만, 에드가는 난생처음 느낀 고독감에 환희를 느낀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한 블루진 노래도 부르고, 재즈 음악을 찬미하며 자신과 닮은 인물이 등장하는 <로빈슨 크루소>, <호밀밭의 파수꾼>도 읽는다.

 

이후 그는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휴지 대용으로 쓸 물건을 찾다가 발견한 <젊은 베르터의 고뇌> 속 베르터가 첫 인물이었다. 처음으로 책을 읽었을 때 그는 베르터의 소극적인 태도와 작품의 현란한 문체를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자신과 닮은 외톨이 베르터에 점차 마음을 이입하게 되고 그의 말과 입을 빌려 자기 심정을 토로하게 된다. 짝사랑 상대인 샤를리와 처음 만난 날, 그녀의 약혼자를 목격한 날을 비롯하여 베를린에서 구한 공사장 일자리에서 작업반장과의 갈등 상황, 그리고 사직서를 제출하던 날에도 그는 자신의 심정을 베르터의 대사를 빌려 대신 털어놓는다. 고향의 친구 빌리에게로 보낼 테이프에 녹음하기도, 누군가의 면전에 대고 ‘베르터 권총’을 쏘아붙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뜻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의 마음을 이해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록 에드가는 베를린의 사람들과도 다소 어긋난 소통을 나누고, 보답받지 못할 짝사랑을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목표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누구의 강요도 없이, 그저 자기 자신 마음속에서 이끌어낸 목표. 바로 연기가 나지 않는 색채 분무기인 NFG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모르고, 제대로 된 도구도 없었지만 반드시 성공해야 할 일이었다. 자신보다 먼저 NFG 제작에 몰두하던 공사장 동료들이 만든 것보다 더 대단한 NFG를 만들고 난 뒤, 혼자만의 세상에서 벗어나 사회로 복귀하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그것이 잘 되었을까? 아니! 도구가 부족했던 것인지, 전류를 다루는데 세심하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의 귀환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인지 몰라도 그는 작업의 마지막 순간에서 서두르다가 결국 감전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출 이후 겨우 4개월 만이었다.

 

 

 

마음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처음 책을 읽은 후로도 여러 차례 재차 펼쳤다. 처음에 이해한 에드가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속내의 사람 같았다. 억울한 바를 말로 표현할 줄 모르고, 샤를리를 짝사랑하면서도 그의 약혼자와 어울리는 데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내어 공사장 동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점도 그러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완곡하게 제 뜻을 전하고, 무난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법도 한데 말이다. 그러나 에드가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곁눈질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야 했고, 누군가를 보고 싶다면 반드시 찾아가야 했다. 충동을 “참을 줄을 몰랐”다.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며 공연히 주위를 뱅뱅 맴도는 어린아이 모습을 한 에드가를 발견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깊은 외로움이 보였고, 사람에게 다가갈 줄 모르는 어리숙함이 보였다.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선생님과의 갈등 사건부터 낡은 오두막에서 홀로 숨을 거둔 죽음의 순간까지, 그의 주위에 사람들은 있었을지언정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이는 없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반항심을 드러낸, 십 대 특유의 주체 못 할 성미도 타인이 가까이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그만큼 어리숙했던 나의 십 대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열일곱 살 남자애가 참으로 외로워 보이기도 하다.

 

에드가도 자신의 외로움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비록 고백할 만큼의 용기가 없었을지언정, 그의 외로움이 불쑥 머리를 내밀던 순간이 있었다. 친구 빌리가 자신의 테이프를 이해하지 못함에도 일방적인 연락을 보내던 것, 샤를리의 신혼집이나 아버지와 애인의 집에 자신도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던 것, 그리고 어떻게든 성공을 거두고 되돌아가려 했던 것. 그는 누군가와 함께 사는 삶을 바라왔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타인과 얽히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방인의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어떻게 되었나. 어머니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작업의 속도를 높이다가 죽어버리지 않았던가. 사람들의 세계에 편입되길 간절히 바라던 에드가는 결국 그 소망으로 인해 죽고 말았다. 이방인에게 자기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나와 당신의 이방인


 

에드가는 죄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발로 떳떳하게 돌아와도 문제 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어째서 성공의 결과물을 거머쥐어야만 복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그가 실수 하나로 자신의 삶 전부를 매도당했기 때문이다. 버르장머리 없이 선생에게 대들고 끔찍한 상해를 입힌, 본성을 드러낸 반항아라고 말이다. 여기에서부터 죽음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실수 하나를 메꾸기 위해 더욱 큰 위험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누군가를 한 번의 성공 혹은 실패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응당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어야만 한다”는 문장을 안다. 인간은 끝없는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내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한순간의 단호한 배제에서 인간은 외톨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고립의 경험이 그를, 영원히 사람들 주위를 배회하는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는 사회가 건강하고, 잘못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옳다. 언젠가는 그런 기회가 우리에게도 간절히 찾아오는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     *     *

 

현실에도 수많은 이방인이 있다. 만원 지하철에서 무심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럴 때면 주위의 모두가, 심지어는 자신조차 이 세상의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타인의 거리감보다 훨씬 깊은, 개인주의와 오지랖 사이의 긴 어둠에서 갈팡질팡하며 혼자서 떠도는 것 같은 사람 같다고. 하루 종일 바쁘게 걸어 다니지만 결국 어디에도, 마음 붙일 누군가를 찾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이방인일지도 모른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 그렇지만 서로가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는 눈빛. 타인의 실수 하나에 득달같이 달려들 수 있을 것 같은, 피로와 분노에 젖은 눈.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이 분명하고 자기 이외의 무엇도 중요하지 않은 듯 표정 짓지만, 사실은 에드가처럼 외로운 존재로서 매일 이 넓은 땅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자기 마음속의 공허를 메꾸기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오지랖 없이 깔끔한 관계, 개인주의 문화, 폐를 끼치지 않고 그만큼 타인의 실수도 용납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우리 스스로가 고립된다는 것을. 그저 에드가의 가슴 한 번 쓸어주었으면 되었을 일을, 우리도 외로운 마음 한 번 안아주면 될 터인데. 그 해답을 알면서도 항상 위태롭게 내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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