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책벌레였다. 쉽사리 연상되는 그 모습이 과거의 나였다. 방 한편을 가득 메운 책장 앞에 앉아서 하루 종일 책을 보는 애. 무해하고 순진해보이는 그 어린애가 예전에는 익숙했다.
한 살, 두 살 자라고 내게도 의무라는 것이 주어지면서 과거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꽤나 이른 나이에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다룰 수 있게 된 것도 한몫 하였다. 그러나 책의 추억이 한순간에 사라진 계기는 따로 있었다.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윗집 어린애들에게로 책들이 처분된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쓰레기장으로 갔다. 손때 묻은 소중한 추억이 순간에 사라졌다. 내 방에는 즐거움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따스한 햇살, 다시 봐도 재밌는 책들 무더기, 바깥의 어른들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소리, 더는 바랄 것 없는 매일. 이러한 하루를 보내던 어린 시절의 나도.
누구에게나 있는 기억일 테고, 자라난 우리에게 남겨진 결핍이 아닐까 이따금 생각한다. 다 큰 어른으로서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어린애를 부러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까? 이렇게 무덤덤하고 신경질적인 어른에게도 그런 따스한 추억이 있었는데, 책을 읽으며 햇살의 따스한 냄새를 맡을 수 있던 때가 있었는데.
유난히 기억에 남는 책들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큰 사랑을 받았던 책들이 특히 그렇다. 동년배의 누구에게 물어봐도 되돌아오는 반가움을 기대할 수 있는 책이 있다.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이 그중 하나다. 청결과 청소와는 거리가 먼 게으름뱅이, 그야말로 돼지 같은 아빠와 아들 둘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가버리고 남은 셋은 돼지로 변해버리는 이야기. 그 책의 주제나 교훈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을지는 미지수지만, 책의 분위기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지극히 한국적인 우리 집과는 거리가 먼 서양식 집 구조와 인테리어, 특유의 소파 디자인과 벽 무늬, 주방의 모양, 사람들의 옷차림과 그 위를 빈틈없이 덮은 다채로운 색. <돼지책>은 책등만 보인 채 반듯이 꽂혀있던 책들을 거스른 채 떳떳이 표지를 내밀고 있던 책 중 하나였다.
저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을 검색한 순간 등장한 <돼지책> 한 권이 나를 예술의전당으로 이끌었다. 혼자만의 속도로 걸으며, 십 년도 넘은 과거의 기억을 반추했다.
* * *
앤서니 브라운은 세계인의 사랑을 담뿍 받는 작가다. 그는 앞서 언급한 <돼지책>을 비롯한 <윌리>, <고릴라> 등 누구나 알만한 그림책을 펴내왔다. 쉬이 남발되는 그 스토리텔링이란 것의 대가이기도 하고. 어린이들까지도 사랑하는 그림책의 스토리텔링이란 점에서 그의 능력은 더욱 의미가 있다. 어린애들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긴 글을 읽어나가는 일에는 소질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많지 않은 수준의 글과 사진으로 내용을 연결하고 곳곳에 재미 요소를 넣어 어린이들의 가느다란 집중력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면, 그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대해선 말 다 한 것이나 다름없다.
운이 좋게도 마주친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의 스토리텔링 방법을 이해하게 되었다. 1979년 출간된 <사냥꾼을 만난 꼬마곰>이라는 책은 쫓아오는 사냥꾼으로부터 꼬마곰이 그림을 그려 도망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만약 ‘꼬마곰 뒤로 사냥꾼이 따라오자 코뿔소를 그려서 겁을 먹게 하고, 함정에 빠지자 새를 불러내어 구덩이로부터 날아서 탈출한다’는 내용을 전달한다면, 몇 장의 그림과 글을 만들어야 할까? 머릿속 영상으로는 쉽게 그릴 수 있다. 그러나 그림책은 모든 장면을 보여줄 정도로 친절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몇 장의 그림을 그리고 몇 줄의 글을 써야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까?
앤서니 브라운은 단지 6장의 그림과 4줄의 글로 내용을 전달했다. 장면 사이의 광대한 여백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그의 스토리텔링은 이야기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았다. 글과 그림이 보조를 맞춰 일부의 정보만 전달할 뿐, 독자가 남은 부분을 해석하도록 내어주는 것이 핵심이다.
* * *
그의 책에 자연스레 녹아든 스토리텔링 기술처럼 자라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소파에 눕듯이 기대앉은 <돼지책>의 아버지 뒤로 펼쳐진 돼지의 게으른 그림자가 그러했다. 온갖 색과 무늬로 가득 메워진 다른 장면과 달리 홀로 남은 어머니의 그늘진 뒷모습은 유난히도 쓸쓸해보였고. 어두운 머리칼로 옆얼굴을 감추고 선 여인의 얼굴을 그때는 몰랐지만,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쯤은 이제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때 알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알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평일 오후의 비어진 전시장을 거닐며 걸음마다 헛헛한 마음을 마구 헤집었다. 아무런 악의도, 욕심도, 또 피로도 없이 충직한 시선을 던지는 그림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했을까. 오래전 헤어진 가까운 이를 만난 듯 반가우면서도, 걸음의 끝이 다가올수록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출구 바로 왼편에 그의 전신이 인쇄되어 있었다. 나의 유년 세계를 가득 채워줬던, 바로 그이다. 무색무취의 내면세계를 이렇게나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나는 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감사가 향해야 할 방향 하나를 마주한 것 같다.
그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로 여기를 보고 있었다. 무표정으로 굳어버린 표정을 풀고 작별하고 싶다. 내가 어린이다울 수 있게 해준 그에게, 그리고 나의 유년기에게. 명랑하고 밝았고, 늘 희망으로 가득 찼던, 자그맣고 무력하지만 그래서 또 사랑스러웠을 그 애를 향해. 언젠가 사진 속에서 본 그 밝은 미소를 향해 어정쩡한 미소를 지어주는 나의 얼굴을 본다. 방에 가로누워 <돼지책>이나 <고릴라>를 보고 웃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냐고 누군가에게든 묻고 싶다.
출구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인다. 두 시점 사이에서 갈등한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그렇지만 나를 끔찍이 여겨주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만들어주었던 사랑을 느낀다. 만질 수 없지만 충분히 가득한 사랑. 그것이 나에게 있었다는걸,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걸 느낀다. 걸음을 바로잡고 바깥으로 나선다.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다. 온기가 슬픔을 끌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