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전시장을 방문한 것 같다. 분명 전시장이란 곳은 나에게 익숙한 곳이었는데 어느샌가 문득 시간을 내서 가야 하는, 익숙하기보단 새로운 것에 가까운 장소가 되어버렸다.
일상이 변하면 자연스레 취향과 공간도 변모해 나간다. 취향은 여전하지만 익숙한 장소들이 서서히 변해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영화관, 전시장, 서점 같은 내 취향이 묻어났던 공간들이 문득 소중한 과거의 기억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틔움 전시는 그런 나에게 있어 선물 같은 하루를 선사해 주었다. 아트인사이트에서 활동하는 5인의 작가들, 나른, 유사사, Mia, 대성, 은유 작가의 작품들이 내게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우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3년 전, 처음으로 전시장을 방문하기 위해 갔던 성수동, 아주 오랜만에 그 거리를 다시 방문했을 때 3년 전의 기억이 며칠 전의 기억처럼 익숙하게 느껴졌고 굉장히 반가웠다. 항상 전시장을 찾기 어려워서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들어갔던 나인데, 이곳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틔움’이라고 쓰여있는 현수막을 지나쳐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공간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전시장을 내가 사랑했던 이유를 계단을 내려오고 다시 그 계단을 올라가 전시장을 나가기까지의 시간들을 통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가 먼저 봤던 작품은 나른 작가의 작품이었다. 연인들과의 기억을 작품 속에 담아낸 그가 굉장히 용기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의 기억, 그것도 한때는 가장 소중했지만 이제는 곁에 있지 않은 그 사람과의 기억을 무언가로 표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나른 작가의 <다정함>
예술 작품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소재인 ‘사랑’. 가장 많이 인용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는 바로 진솔함이다. 마치 그 사랑이 이뤄졌던 시간과 공간을 투명 인간이 된채로 엿보듯, 내밀하고 진실된 풍경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사랑에 관한 그 모든 기억들이 숭고하게도, 그리고 무척이나 소중하게도 느껴진다.
은유 작가의 <선인장>
또한 그다음으로 ‘은유’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나는 선인장이라는 작품이 유독 인상 깊었다. 나는 언제나 광활한 공간 속 홀로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짐과 동시에 어떤 슬픈 감정이 밀려온다. 태양이 내리쬐는 그 해변 앞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 그곳을 더 거대한 그림자로 에워싸고 있는 선인장과 그 가시들. 이 작품에는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그 모든 상반된 정서들이 공존해 있다. 절망이 있기에 희망은 더 소중하고, 슬픔이 있기에 기쁨 또한 더욱 와닿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마냥 긍정 혹은 부정을 말하고 있지 않은 그 오묘한 작품이 내 마음을 고요하게 적셔왔다.
유사사 작가의 <총총>
그 밖에도 유사사 작가의 작품 ‘총총’을 보고 있자니 겨울날의 따스함이 떠오르는 듯했다. 햇살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요즘 같은 날, 지난 겨울을 되새기며 그 차갑던 추위와 그 추위 속에서도 이따금 내비치던 그 햇살의 따스함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형체 안에 되려 더 많은 것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으로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대성 작가의 <존재의 근원>
또한 대성 작가의 작품들을 만났을 때는 우리 일상 속 다양한 측면들을 그만의 시선으로 그려낸 점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밝은 색감과 이미지들 안에 그만의 깊은 사색이 느껴져 흥미롭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나 이 '존재의 근원'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는데 귀여운 캐릭터와 밝은 해변의 이미지가 담겨 언뜻 보기엔 가벼워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을 계속해서 생각하다보니 미술 작품을 관람하면서 느낄 수 있는 그 '해석과 사색'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Mia 작가의 <나는, 이제 Ca va>
마지막으로 Mia 작가는 나에게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릴 때 그림책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그 특유의 인쇄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서 그런지 출처모를 애상감에 휩싸인 채로 작품들을 감상해나갔던 것 같다. 일상에서 보기 힘든 색감으로 가장 일상적인 순간을 포착해낸 그의 작품을 보고 있는데, 마치 그것이 나에게 오랜만에 전시장을 방문해 느낀 바로 그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의 감정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아주 오랜만에 보게 된 전시. 5명의 작가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로 그려낸, 그리고 그들의 재능을 캔버스 위에 꽃피워낸 이번 전시가 나는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다시 예전의 나의 일상, 전시장을 자주 드나들었던 그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날도 슬슬 풀리는 요즘 같은 날,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다 더 충만한 일상을 살아가고 싶다고 소망하며 기분 좋게 전시장을 나갔던 소중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