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나의 장면으로 강렬히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이 영화 속 주인공 ‘김영호’의 모습을 어린 시절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그저 그 외침과 그의 표정이 우습게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 그 영화를 다시 봤을 땐 그 장면을 그저 우습게 볼 수 있었던 그 어린 시절의 내가 문득 그리웠다.
처음 그 장면을 마주한 어린 시절의 나는 단지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렇게 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나는 다시 그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영화는 한번 볼 때, 그리고 두 번 볼 때 느껴지는 느낌이 매우 상이하다. 이 영화 역시 그러한데, 한 가지 계속해서 짙어지는 감정은 공허함과 그리고 슬픔이라는 정서이다.
수능이 끝나고 문득 이 영화가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처절한 울부짖음에 눈물을 글썽였다. 김영호의 그 울부짖음이 외쳐진 그 충북 제천의 어느 한 마을 인근을 찾아갔을 땐 따스한 햇살 아래 흐르던 강도, 회색빛 조약돌 위에서 해맑게 노래 부르던 그 장소도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무성한 풀들과 메말라 버린 강물, 그리고 그 앞에 처져있는 녹색 빛깔의 철조망만이 나를 반겼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훑고 간 자리에는 단지 허탈함만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의 엔딩, 지나가는 철도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김영호의 모습에서 나는 어쩌면 그는 그 순간 잠시 그의 미래를, 그 뒤에 그의 삶에 찾아올 시련들을, 그 시련들의 끝에서 결국 그 철도 위에서 처절히 울부짖었던 그 자기 모습을 마주한 게 아닐까라고 느꼈다.
그 순수했던 청년의 얼굴, 그리고 모든 회한과 슬픔이 서려 있는 그 삭막한 얼굴, 이 두 얼굴의 사이에는 많은 젊음이 악몽처럼 짓밟혔던 한국 현대사의 부조리와 그리고 시대의 상흔에 그저 무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던 한 인간의 가늠하기 힘든 책임이 짙게 서려 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영화가 있고, 그럼에도 살아야 하겠느냐 되묻는 영화가 있다. 대부분 희망을 외치며 끝나는 영화들 사이에서 첫 시작부터 주인공의 죽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나를 포함한 당시 이 영화를 처음 본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 자신에게 찾아온 한 남성에게 울분을 토해내며 위협하는 영호의 얼굴에 아주 찰나이지만 어리숙한 소년의 모습이 비쳤던 건 ‘윤순임’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이다. 순임과의 기억을 되살리는 건 어쩌면 영원히 돌아갈 수없는 젊은 날의 순수성과 마주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에게 무척 불쾌한 경험일 테지만 그럼에도 병실에 누워있는 순임에게 찾아간 영호의 모습에서 김영호라는 인간의 내면 속 자리한 따스함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더 깊은 절망인지, 아니면 얕게 도사리고 있는 희망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김영호라는 인물 또한 단지 시대의 피해자로 일관하기에는 그의 책임과 의지를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몇몇 불쾌한 장면들이 이 영화 속에 자리한다.
그럼에도 그를 향한 비난보다는 측은한 마음이 짙게 드는 건, 한 소녀를 살리기 위해 쏘았던 그 총이 정말 안타깝게도 소녀의 죽음으로 이어진 그 날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머릿속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순임이 선물해 준 박하사탕이 짓밟혔던, 그리고 끝끝내 지키고자 했던 순수성이 그 자신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무력감으로 바스라졌던 그날의 아픔이 그를 결코 원망할 수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이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로 자리하고,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자리할 영화이다. 내겐 이 작품이 영화가 단순히 한 영상물을 넘어, 누군가의 삶을 감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매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영화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이 영화를 다시 마주할 날이 올 테지만, 그때의 나는 이 영화를 지금처럼 볼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 내가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그 정서를 사무치도록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인생에서 영원한 건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때의 나에게도 지금의 순수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있길 간절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