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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냉전시대, 미국과의 우주경쟁 속에서 소련은 스푸트닉 2호를 보란 듯이 쏘아 올린다. 그리고 우주선에는 세계 최초로 살아있는 생명체, 강아지 '라이카'가 탑승해 있다.


라이카가 도착한 곳은 어린 왕자의 행성 'B612'. 라이카는 이곳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해 준 인간 캐롤라인처럼 말을 하게 되어 기쁜 라이카.


이곳이 마치 캐롤라인이 자주 읽어주던 책 <어린 왕자>와 비슷하다고 느끼며, 라이카는 다시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 캐롤라인을 만나기 위해.


쓸쓸해하는 라이카에게 어린 왕자와 장미는 캐롤라인을 닮은 로봇 '로케보트'를 선물한다. 로케보트는 캐롤라인과 정말 닮았지만 따스한 웃음과 온기가 없다. 마치 챗GPT처럼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로봇과 대화할수록, 라이카에겐 마주하기 힘든 '진실'이 드러난다.

 

 


기다리는 존재는 대체되지 않는다


 

라이카가 행성에 도착해서 한 첫 번째 말은, "내가 존재가 되었어!"


라이카는 드디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직접 이야기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라이카는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뛸 듯이 기뻐한다. 정확히는, '캐롤라인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한다. 라이카의 세계는 캐롤라인이라는 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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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라이카는 늘 캐롤라인을 기다려온 존재였다. 라이카는 어린 왕자의 행성에 도착해서도 그녀를 기다리며, 그녀가 있는 우주에 존재하고 싶어 한다. 기다림은 그 사람의 우주와 세계를 결정한다. 기다리는 존재는 자신이 기다리는 우주와 세계에 서서히 길들여진다.


이런 면에서 라이카와 대조적인 존재는 '로케보트'이다. 챗GPT를 연상케 하는 로케보트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의 감정이 없다. 그렇기에 로케보트는 '시키지 않아도 기다리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다. 사용자 계정에 따라 다른 대답을 내놓는 '맞춤형'일뿐.


어린 왕자는 로봇을 캐롤라인의 대용으로 선물해 주었으나 라이카는 오히려 더 쓸쓸해진다. 기다림은, 온기는, 사랑은 대체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랑이다


 

한 그림책에서 "지옥은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었다. 그렇다면 천국은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B612 행성에 처음 도착했을 때, 라이카는 캐롤라인처럼 말하고 걸을 수 있어서 마치 천국에 온 것처럼 기뻐했다. 반면 어린 왕자는 지옥을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을 반복하며, 인간을 어느덧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의 복수심에 사로잡혀버린 어린 왕자는 자기 자신의 감정에 이용당하고 있다.


어린 왕자는 라이카에게 인간의 '진실'을 알려주며, 타노스처럼 인간세계를 폭파할 자신의 계획을 공개하기까지 한다. 어린 왕자가 너무 흑화해서 다소 충격적인 부분이다.

 

왕자의 끔찍한 계획을 들은 라이카는 부정하고 싶은 진실에 분노하지만, 자신이 철창에 갇혀 있던 상황이 인간들과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많이 알게' 된다. 안다는 것이 나의 세계를 아는 것이라면, '더 많이 안다'는 것은 나의 세계와 상대방의 세계가 겹쳐지는 지점을 아는 것일 테다.


지옥과 천국을 가르는 것은 사랑이다. 누구를 싫어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형벌이 된다. 그 사람이 계속 내 삶 속에서 예측 가능해지며, 오히려 더 많이 생각나는 존재가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라이카처럼, '더 많이 아는 것'을 택할 수 있다.


라이카는 어린 왕자처럼 인간들을 타자화하지 않는다. 도리어 역지사지하길 택한다. 극 중 대사로는, '다른 선택'을 하기로 한다. 아직 오지 않은 이들을 기다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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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라이카는 매일 기다리지만, 반대로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과학자들에게는 철저히 수단으로 대해졌다. 누가 나를 수단으로 대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영웅이 되려면 나를 우리로 생각할 수 있는,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라이카>의 캐치프레이즈이자 넘버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어구다. 공연을 다 보고 나면 마치 라이카가 하는 말처럼 들린다.


나를 위해, 나를 구원하자.

나를 위해, 너를 사랑할게.

그래서 나를 위해 너를 구원해.

그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구원해.


 

 

실존주의적 아름다움


 

많은 사람들이 <라이카>의 캐릭터들 중 '장미'를 제일 좋아할 것 같다. 왜냐면 다소 어려운 작품에서 가장 이해되는 캐릭터이자 '멋진' 역할이기 때문이다.


혼란을 겪는 캐릭터들 중 장미만이 확실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장미는 나를 아름답게 하는 것을 하면 그걸로 충분한 삶이라고 말한다.


장미는 'love myself'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자존감이 높은 캐릭터다. 나의 존재를 나 스스로 정의할 수 있다고 하고, 내가 정의한 대로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다고 당당하게 외친다. 장미에게 아름다움이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장미는 눈물을 먹고 자랐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은 장미도, 아직 어린 왕자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존재다.


이렇게 뮤지컬 <라이카>는 기다림, 존재, 언어, 아름다움 등 우리의 근원에 대해 계속 질문해보게 한다. 다만 아직 초연인만큼,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가장 아쉬운 점은, 결말이다. 이 모든 게 다름 아닌 캐롤라인의 꿈이었다니. 다소 <파리의 연인>이 생각나는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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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가 캐롤라인이 읽어준 어린 왕자를 만난 건 캐롤라인이 보고 싶어서 아니었을까, 그래서 라이카가 죽기 직전 꿨던 꿈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캐롤라인의 꿈이었다. 게다가 이를 30초가량으로 설명해 주니 액자식 구성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마음과 이유에 대해 다루고 싶었다면, 좀 더 진정성 있는 분량과 내용이 필요했다.


또한 주연들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린 왕자의 분노가 너무 세다는 느낌이다. 왕자가 나중에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라이카를 돕겠다는 선택이 조금 더 자세히, 서사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라이카의 선택이 약간 두루뭉술한 느낌이 있는데 왕자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왕자에게 유치하다고 말하던 라이카가 결국엔 크게 분노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도 약간 캐릭터에 벗어난다고 느껴진다. 왜냐면 라이카는 이전까지 너무나 '댕댕미'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장미가 나만을 위한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조차 라이카는 캐롤라인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분노할 때는 너무나 '인간스러운' 자기중심성이 갑자기 드러난다. 분노보다는 슬픔으로 표현하는 게 좀 더 맞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일부 실화이다


 

뮤지컬 라이카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 냉전의 한복판, 소련은 스푸트닉 2호에 살아 있는 생명체 라이카를 태워 인류 최초로 우주에 보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편도로 쏘는 것만이 가능했다. 애초에 지구로 귀환할 수 없었기에 인간이 아닌 동물이 필요했던 것.


강아지의 실제 이름은 '라이카'가 아니었다. '쿠드랴프카'였는데(극 중에서도 이 이름을 잠시 언급한다), 원래 쿠드랴프카는 시내를 떠돌던 개였다. 과학자들은 길거리에서 생활한 개들이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에서 더 잘 살아남을 거라고 믿었다. 쿠드랴프카는 그중 가장 온순하고 침착하여 우주견으로 선발되었다.


라이카는 발사 1주일 후 자동으로 독약이 든 음식을 먹고 안락사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우주로 7시간 만에 3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발사 당시 고온, 고음, 고진동 속에서 고통스럽게 떠났을 라이카를 생각하면 죄책감과 미안함이 한없이 몰려온다.

 

 


뮤지컬 <라이카>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소설 <어린 왕자> -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어린 왕자>. 읽는 나이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고 하는 책이다. 뮤지컬 <라이카>를 보고 난 후 다시 <어린 왕자>를 읽으면 또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림책 <메피스토> - ‘지옥은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문장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그림책이다.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메피스토>의 이야기는 <파우스트>와 전혀 딴판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인간 친구의 옆에서 떠돌이 개 매피스토가 다시 한번 '마법'을 발휘하는 이야기다. 그림책이라 후딱 읽을 수 있는데, 뒤로 갈수록 눈물이 정말 줄줄 흐르니 휴지를 꼭 챙기고 읽으시길.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뮤지컬 <라이카>는 '라이카가 어린 왕자의 B612 행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면?'이라는 가정을 시작점으로 삼은 철학적인 극이다. 라이카는 어린 왕자를 만났지만 연출적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생각났다. 

 

웹툰 <마루는 강쥐> - '나 사람 됐다 짱이지. 이 손을 봐, 대박임'이라는 밈으로 유명한 웹툰 <마루는 강쥐>. 강아지 마루가 어느 날 사람이 된다. 언니를 지켜주기 위해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강아지 마루. 마루의 마음이 라이카의 마음이랑 같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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