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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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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황량한 시골길의 나무 아래에서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왜 그를 기다리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 없이, 단지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에스트라공은 신발을 벗으려 애쓰고, 블라디미르는 모자를 만지작거린다. 서로 사소한 대화를 나누거나 다투기도 한다. 그리고 포조와 그의 하인 럭키가 등장하는데 포조는 럭키를 줄로 묶어 끌고 다니며 럭키는 포조의 명령에 따라 춤을 추거나 생각을 발표한다. 밤이 되면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오늘은 오지 못하지만 내일은 올 것이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그들은 내일도 고도를 기다리기로 한다···.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나에게는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끝없는’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끝없는 기다림’.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있을 때, 나는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이해했다. 끝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목과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이 책의 이야기는 끝없이 기다리는 두 남자에 관한 것이다. 극이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은 이따금 ‘꽁꽁 묶여있는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마치 ‘기다림’의 밧줄에 묶인 듯 기다리는 것 외에 어떠한 행동도 실행하지 못한다. 떠나볼까 하면서도 움직일 수 없고, 나무에 목을 매달아 볼까 말하면서도 죽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서 두 사람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신발을 벗어보기도 하고 모자를 만지작거리기도 하며 서로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기억하려 애쓰고 실패하고 노래를 불러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은 어떠한 사건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행동함과 동시에 허공 속으로 흩어진다. 그래서 반복해야만 한다. 이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그들의 모습은 실존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암시한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자"고 말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두 사람은 앙상한 나무 하나가 있는 이 불모의 공간을 떠나지 않고 어딘가에 도착하지도 않으며 계속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다. 마치 정지된 듯 보이는 그들의 세계는 ‘반복’이라는 실천을 통해 지속된다.

 

에스트라공은 매일같이 신발을 벗고 다시 신으며 발이 아프다고 말하며 블라디미르 역시 모자를 벗었다가 다시 쓰는 행동을 반복한다. 이 반복된 행위는 마치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의 형벌을 연상시킨다. 형벌을 거부하지 않고 무의미를 자각하는 시지프처럼, 그들이 행하는 반복은 무의미를 견뎌내는 실존적인 저항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짓거리를 다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다. 뭐랄까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

 

비록 그들은 움직이지 않지만 완전히 멈춰 선 것도 아니다. 그들의 존재는 정지와 반복 사이에서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에스트라공: 잊어버렸다.

블라디미르: 기억력이 농간을 부리는게야.

 

 

작품 속의 시간은 인물들의 움직임처럼 정지해 있고 이것은 흐릿한 기억과 연결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자신들이 어제 무엇을 했는지 방금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제 뭘 했느냐구?>, <그 얘기를 이미 해줬던가?> 그들은 어떤 것도 확신하지 못하며 자신들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다. <고도를 기다려야지><그렇지. 참···> 이 기억의 결핍은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더 이상 시간 위에 구성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시간은 어제가 오늘과 구별되지 않고 오늘이 내일로 연결되지 않기에 그들은 되풀이되는 영원한 현재 속을 떠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뭐든 말을 해봐>, <지금 찾고 있는 거야···.> 그들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면서 반복되는 질문과 응답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직 '말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말을 하기 위한 ‘말'은 논리적이기보다는 때때로 반복되고 뒤틀리며 유희처럼 흘러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침묵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끝은 죽음이다.)

 

말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두 사람만이 아니다. 포조는 모두에게 자신의 말에 집중할 것을 요청하고 그의 밧줄에 묶인 하인 ‘럭키’가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때도 쏟아내는 장황한 언어 속에서다. 

 

<다시 말하면 지옥을 하늘까지 들어올리게 되겠는데 그 하늘은 오늘까지도 때로는 파랗고 너무나 고요한데 그 고요는 수시로 중단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반가우니 속단은 금물이고 또 한편으로는 미완성인데도 불구하고···.>

 

작품 속의 말은 끊어져 있고 비논리적이며 소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물들은 부서진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 애쓰지만, 그 모습은 때때로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존재는 말하기 전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들에게 있어 말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실존적 저항이며 동시에 구원을 위한 기도다. 그렇기에 침묵할 수 없다.

 

2막으로 구성된 이 책에 3막, 4막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들은 계속 말할 것이다. 언어라는 부서진 땅 위에 자신의 존재의 집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말들은, 결국 무의미한 세계 속에 '내가 여기 있다'는 선언이 된다. 비록 모든 말이 허공 속으로 흩어진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말하기란 살이 있음의 마지막 증표이며, 무로부터 자신을 밀어내는 존재의 몸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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