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을 해석하는 동물이다. 처음 보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낯선 현상에는 이유를 만든다. 첫만남의 행동을 통해 성격을 짐작하고, 사건의 전말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오래 견디지 못하기에 우리는 쉬지 않고 기준을 세운다. 문제는 그 기준이 대부분 인간 자신에게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신을 상상할 때조차 인간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신 역시 인간과 같은 잣대를 가질 것이라 기대한다. 선한 신은 생명을 구하고, 악한 신은 생명을 앗아간다. 인간에게 악한 행동은 신도 나쁘게 볼 것이라 기대하며 오래된 신화부터 현대의 창작물까지 줄곧 그러한 방식으로 신을 그려왔다.
그러나 지브리 스튜디오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속 신은 조금 이상하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크게 두 개의 편으로 나뉜다. 문명의 발전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에보시와 타타라 마을사람들, 그리고 이를 저지하여 숲을 지키고 그 안의 생명들도 지키고자 하는 원령공주 산과 늑대들이 그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둘 중 한 쪽에 몰입하게 된다. 캐릭터들은 어느 편이던 그들 나름의 선과 악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모두 타당하게 들린다. 여기서 사슴신, 즉 시시가미가 등장한다.
시시가미는 극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신이다. 여타 동물 신들에게도 추앙을 받는 신 중의 신이며, 인간에게는 깊은 숲 속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존재로써 미지의 두려움을 주는 존재이다. 그는 아시타카와 그의 사슴 야쿠르의 상처를 치유해준다. 그러나 멧돼지 신 옷코토누시의 상처는 치유해주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거두어 간다. 이 두 장면을 보면 관객은 그의 판단 기준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떤 기준으로 그는 생명을 주거나 거두어 가는 것일까? 그와 함께 절대자로 보이는 그가 어느 편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이 사태를 정리할지 궁금증이 따라온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영화의 후반부에 해결이 아닌 오히려 극대화 되기 시작한다. 시시가미가 밤의 모습인 데이다라봇치로 변하는 중에 목을 잘리게 되자, 그의 안에서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액체들이 목을 찾으러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니며 닿는 모든 것들의 생명을 앗아가기 시작한다. 숲의 생명과 동물 신들 그리고 인간까지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폭주하는 죽음을 바라보면 과연 시시가미가 좋은 신이 맞는건지 의문이 생긴다. 그가 신이라면 악을 단죄하고 선을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닌지 묻게 된다. 어느 쪽도 악이 아니라면, 왜 모두를 돕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주어야 했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 질문은 처음부터 인간의 기준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신이라면 선을 돕고 악을 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시시가미의 행동이 일관되지 못하다고 여기며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의 행동이 모순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신에게 인간의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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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에서 시시가미는 머리를 되찾았지만 아침이 옴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숲은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이 죽음은 끝이 아니다. 황폐해진 땅 위에는 다시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숲의 정령 코다마도 새로이 등장한다. 아시타카의 저주는 물론 마을의 나병 환자들도 병이 나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시가미는 생명을 앗아간 동시에 다시 탄생시킨 것이다.
그에게 생명은 선 죽음은 악으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닌 하나의 순환 안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죽음은 곧 실패를 의미한다. 가능한 늦추고, 피하고, 막하야 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시시가미, 즉 자연에게는 그 두개가 반대말이 아니다. 한 생명의 죽음이 있어야 다른 생명이 이어지고 시작된다. 영화 속에선 시시가미가 생과 사를 관장한다는 식의 대사가 등장하지만, 그가 관장하는 것은 생명이 아닌 순환 그 자체로 보인다.
그렇기에 시시가미가 어느 편인지에 대한 아리송함은 끝내 해결되지 못한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답을 숨겼기 때문이 아닌, 애초에 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시시가미는 단 한번도 어느 편에 서지 않는다. 후반부의 폭주하던 모습조차 목이 잘린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목을 찾으려고 행동했을 뿐이고, 결국 새로운 생명을 주는 모습을 통해 그것이 징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생명의 부여 역시 미래를 위한 선물이라기보단 그냥 그것이 순환이라는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시가미는 인간의 도덕조차 초월한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기준과는 무관한 자연 그 자체에 더 가깝다.
우리는 끝내 시시가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지점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느껴졌던 건,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인간만의 기준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신이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너무나 당연히 여겼던 질문에 되묻게 만든다. 왜 우리는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는가? 자연을 향한 태도에 대한 답은 어쩌면 이 질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