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숲은 언제나 존재하고, 그 속에 사는 수많은 생명은 인간이 붙이는 이름이나 정의와 상관없이 살아간다.
‘모노노케(もものけ)’는 인간이 이름 붙일 수 없는 낯선 생명의 총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극 중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를 가리키는 것은 들개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산. 그러나 그녀를 모노노케 히메라고 부르는 존재는 인간들밖에 없다. 낯섦을 지워내고, 익숙한 귀신의 얼굴로 불러온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해할 수 있는 틀 안으로 붙잡아 두려 한다.
다시 스크린에서 만날 <모노노케 히메>(もものけ姫, 1997)는 언어 이전의 세계, 생명이 서로 얽히고 부딪히며, 결국엔 함께 숨 쉬는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 공간은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을 지키는 산도, 숲을 파괴하는 에보시도, 숭배와 파괴를 동시에 받는 숲도 본질적으로는 그저 생명의 흐름으로 머문다.
자연과 인간 : 인물의 삼각구도
저주를 품은 채 길을 나선 아시타카는 숲과 인간을 모두 바라보며, 미움에 눈멀지 말라는 말을 가슴에 새긴다. 그는 정의로운 영웅보다는 균형을 회복하려는 인물이다. 자연의 분노와 인간의 욕망, 그 어느 쪽도 전적으로 옳지 않음을 그는 몸으로 경험한다. 그렇기에 그의 여정은 상처 입은 사이를 봉합한다.
타타라 마을의 에보시는 숲을 베어내며 철을 녹여내지만, 동시에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을 품는다. 성매매로 착취당하던 여성들에게 노동의 자리를 주고, 나병 환자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허락한다. 모두가 일을 하고, 존엄을 지키고, 행복을 찾는 이상적인 마을은 결국 누군가의 터전을 잃게 하는 대가 위에서 세워진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는 타자의 희생 없이 성립할 수 없다.
숲의 편에 선 산(원령공주)은 인간과 들개 사이의 존재다. 인간을 증오하면서도 인간의 얼굴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존재. 산은 숲의 목소리이자 경고다. 그녀는 자연의 낯선 얼굴이 우리에게 내미는 질문 그 자체다.
총탄 하나가 신을 무너뜨리고, 그 파편은 아시타카의 몸에 저주로 남는다. 사슴신의 머리가 잘려 나가며 숲은 숨을 죽인다. 곧이어 흘러넘치는 검은 액체가 숲 전체를 삼키듯 번져나가고, 땅 위의 풀과 나무들이 한순간에 시든다. 검은 덩어리처럼 몸을 타고 저주의 문양이 흐른다. 폭발음의 잔향과 침묵의 교차, 땅을 기어다니는 어둠의 파편은 자연이 하나의 유기체임을 드러낸다. 문명이 숲을 파괴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병들게 한다.
그러나 사슴신의 죽음이 온전한 ‘끝’이라고 볼 수는 없다.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 선율 위로 거대한 그림자 형상은 숲 전체에 빛처럼 흩날리며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재생한다. 풀이 돋아나고, 꽃은 피어나며, 황폐한 땅은 다시 호흡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아시타카와 산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한 자리에 머물 수 없다. 영화는 공존을 완전한 화해가 아닌, 불완전한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동행으로 그린다.
자연과 인간 : 생명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 生きろ, そなたは美しい)”
아시타카의 대사는 단순히 산 개인에게 던질 말이 아닌, 파괴되는 자연에게 혹은 인간과 신 사이에서 고통받는 존재 전체에게 건네는 위로와 같다. 죽음과 파괴, 증오와 복수의 격랑 속에서,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아름답다. 피와 흙이 뒤섞인 화면 사이로 여백이 남는다.
생명은 강하거나 약한 것,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갈라지지 않는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나무와 풀 한 포기든, 그 자체로 빛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의 욕망과 파괴가 아무리 삶을 훼손한다고 해도, 살아 있으려는 그 본능은 무가치하지 않다.
“사슴신은 죽지 않았어요. 생명 그 자체니까요. 삶과 죽음 두 가지를 가진 분이죠. 내겐 삶을 주셨어요.
(シシ神さまは死にはないよ。生命そのものだから…生と死とふたつとも 持っているもの…わたしに生きろといってくれた)”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여전히 생명을 잉태하는 리듬처럼 흐른다. 재가 되어버린 자연이 활기를 찾으며 흐르는 음악과 아시타카의 대사로 영화는 긍정적인 미래를 그린다.
자연의 죽음은 삶과의 대립이 아닌 순환이다. 죽음은 파괴지만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토양이며, 파멸은 재생을 위한 숨 고르기다. 그렇기에 에보시는 다시 더 좋은 마을 세울 계획을 하고, 산은 숲으로 돌아가고, 아시타카는 그 경계에서 살아간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처럼 상처 속에서 생명을 긍정한다. 삶을 무너뜨리는 힘조차 일부로 끌어안는 태도. 파괴와 분열의 순간조차 삶의 온기와 맞닿아 있다는 자각. 모든 연출과 음악이 마치 살아있음을 찬미하는 듯하다.
현대 사회로 이어지는 질문 : 자연과 연대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에보시의 제철 마을 앞에 서 있다. 풍요와 편리함을 약속하는 도시와 문명은 대체로 다른 생명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다.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는 우리의 ‘이상 사회’가 결코 무고하지 않음을 폭로한다. 우리는 매일 쓰레기를 버리고, 소비하며, 편리함을 누리지만 그 순간에도 자연은 죽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재활용하고, 고기를 줄이며, 불편한 선택을 감수한다. 그것은 완전한 답이 아닌, 저주를 품은 채 살아가는 인간이 내리는 불안한 균형의 몸짓이다.
사슴신이 죽고도 다시 생명의 숲이 움트듯,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파괴 속에서 다시 싹 틔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승리’의 결과가 아닌,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존중하려는 우리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미야자키 하야오 : 자연
미야자키의 영화들은 늘 자연을 다른 얼굴로 그려왔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부해(腐海, 곰팡이 숲)는 파괴처럼 그렸지만 사실상 지구를 치유하는 생태계였고, <이웃집 토토로>의 숲은 아이를 즐겁게 하는 다정한 품이자 친구였다. <붉은 돼지>에서는 인간 욕망의 전쟁이 하늘을 병들게 하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비행을 통해 자연과 조화하려는 꿈을 담았다.
스튜디오 지브리 최초로 4k 재개봉을 맞은 <모노노케 히메>는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질문이다. 급진적이고 치열한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그려내, 아름답고도 숨 막히는 오늘날을 마주하게 만든다. 자연은 더 이상 어린 시절의 토토로처럼 순진한 친구도, 멀리 있는 생태계의 상징만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부딪히고 갈등하며, 끝내 함께 살아가야 할 타자이자 세계의 또 다른 얼굴이다.
‘모노노케’라는 이름이 지닌 낯섦은, 우리가 아직도 끝내 이해하지 못한 자연의 얼굴이다. 모노노케 히메라는 이름은 두려움을 특정한 형상으로 바꾸어 부른다. 어쩌면 우리는 낯선 것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여전히 낯선 얼굴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 낯섦을 두려움으로만 부를지, 혹은 아직 배우지 못한 언어로 천천히 대답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끝내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언어라도 답하려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