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진 스마트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 바빌론은 라라랜드 감독의 작품이라는 기대와 달리 전 세계적으로 부진한 성적을 보였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시대의 할리우드와, 그 속에서 연기하고 영화를 찍으며 욕망과 사랑에 부딪치고 또한 그렇게 산산조각나는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며 난잡하다, 혐오스럽다는 평도 들었으나, '열망하고 쌓아올린 것들이 부서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중 유달리 눈에 밟혔던 인물이 잭 콘래드였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잭은, 무성영화 시대의 핵심적인 인물이자 스타였지만 시대가 바뀌며 ‘한물간’ 지난 시대의 스타가 된 인물이다. 그런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잭에게 연예 칼럼니스트 엘리노어가 말한다.
["이유는 없어. 그래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그냥 당신의 시대가 간 것뿐이야. 끝났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거 알아. 누구도 뒤에 남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
그 장면을 보며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순 동정이나 연민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영원한 건 없고, 모든 것이 낡아간다는 것에 대한 슬픔,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는 이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시내에서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추억을 파먹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올 때, 후미진 가게와 이제 없어지는 재개발 구역 등을 볼 때 느끼는 씁쓸함도 같은 것이다. 젊음을 낭비하고 결국 나도 저렇게 낡아갈 것이라는 절망.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사라진다. 계속해 낡아가고 마모되어 결국 없었던 것이 된다. 그런 장면이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국 나와 닮아서, 혹은 닮아갈 것이기 때문이겠지. 그것이 지나간 영광을 상징하는 잭이라는 인물을 보며 마음 아파지는 까닭이다.
인간이 예술을 함은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고 쌓아온 모든 것들이 결국 영원하지 못함을 알아서가 아닐까. 그래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영화를 찍고 연극을 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거겠지.
우울해질 때면 나는 보통 일기를 씀으로써 그 감정을 해소한다. 누군가 검사하지 않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며 가능해진 일이었다. 누구한테 보여줄 일 없이 오로지 나를 위해 습관처럼 일기를 쓰며,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사라져 가는 것을 지연시켜온 것 같다.
물론 처음에 썼던 글은 지금 와서 읽기엔 참 민망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가 느꼈던 것을 어떻게 하면 더 정확하게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렇게 쓴 글들을 다시금 읽을 때 나는 그때의 내가 아직 그 속에 남아 있음을 느낀다.
<바빌론>의 메세지도 단지 영광의 시대는 지나간다로 끝나지는 않는다. 엘리노어는 이제 당신의 시대는 끝났다는 폭언을 한 뒤 잭에게 이어 말한다.
["하지만 백 년 뒤에 당신과 내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군가 언제라도 당신의 영화 필름을 영사기에 걸면 당신은 다시 살아나는 거야."]
["당신이 죽어도 당신이 나오는 영화를 재생시키는 순간, 당신은 그 안에서 몇 번이고 살아날 거야. 50년 뒤에 태어난 아이가 스크린에서 반짝이는 당신의 이미지를 우연히 보고 당신을 친구처럼 느끼게 될 거야. 그 애는 비록 당신이 마지막 숨을 쉴 때 첫 숨조차 쉬지 않았지만 말이야. 당신은 재능을 타고났어. 감사하게 생각해. 당신의 시대는 갔지만 당신은 천사와 유령들과 함께 영생을 사는 거야."]
시간이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노화는 피해갈 수 없다. 영광의 시대도 청춘도 결국 지나가겠지만, 그런 순간의 기록은 영영 남을 수 있다.
이렇게,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내가 낡아가는 게 더는 슬프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낡아가는 슬픔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나 이후로도 남을 무언가를 선택했음이 약간이나마 위안이 된다.
나의 시대가 가더라도 어딘가에 내가 쓴 무언가가 대신 남아 있을 테니까.
이렇게 여기에 남기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