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첫눈이 내렸다. 유달리 길었던 여름을 뒤로 하고 겨울의 찬 공기를 만끽할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눈이 오면 어쩐지 주변이 고요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눈이 오면 조용해진다고 한다.


기상청 관계자는 "눈이 올 때 눈송이에 물이나 수증기 입자들이 붙어 내리면 음파로 움직이는 소리가 임의의 방향으로 운동하다 부딪히거나 흡수되면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고요하고 추운 날에는 방밖으로 꼼짝도 하기 싫어진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숏폼과 SNS를 열람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가버린다.


소설가 한강의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그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약 100만 부 넘게 판매되었다고 한다. '한강신드롬'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이 '텍스트힙' 열풍을 불러일으켰다는 반응도 있지만, '텍스트힙'은 올해 초부터 그 전조가 일기 시작했다.


텍스트 힙은 글자(text)와 멋지다(hip)를 결합한 단어다. 올해 초 세계적 모델 카이아 거버가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독서는 정말 섹시하다(Reading is so sexy)"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책이나 책을 읽는 모습 등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인증하고 공유하는 문화를 말한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6월까지 전체 시집 판매 중 20대가 26.5%, 30대가 20.2%로 많다. 예스24는 10대 독자에게 팔린 시집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124.1% 증가했다고 밝혔다. 알라딘에서도 2030 여성이 시집에 보이는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


박하나 예스24 마케팅본부장은 “굳이 따지면 시는 ‘숏폼’이다. 숏폼에 익숙한 10대에게 시의 짧고 감각적인 언어가 색다른 감성으로 와닿으면서 인기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날 숏폼 대신 '숏 텍스트'인 시를 읽으며 글자와 나를 사유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오늘은 ‘눈 오는 날 읽기 좋은 시집’을 추천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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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성은, 『Lo-fi』


 

 

좋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자꾸 나를 먼 곳에 옮겨 놓고 가버린다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두부를 썰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죄와 벌」 전문

 

 

강성은의 『Lo-fi』는 제목처럼 '저음질'의 음성으로 듣는 카세트 음악처럼, 나직하고 불명확한 매혹적인 목소리로 독자를 꿈 같은 시공간 속에 초대한다. '수면파' 시인이라고도 불리는 강성은의 시집은 거울과 유령, 겨울과 밤하늘 같은 꿈 속의 초현실적 풍경이 가득하다.

 

너무나도 이상한 풍경을 지나치다 어, 이거 꿈인가? 하는 순간 그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환상적인 경험을 이 시집과 함께해보는 것은 어떨까.

 

 


2. 유희경, 『겨울밤 토끼 걱정』 



 

토끼와 토끼가 아닌 것 사이에서 나는 고통스러워 더 이상 창밖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까지 했는데 다시 혹한의 겨울밤이 되면 마른 바람이 찾아와 창문이 덜컹이고 뼛속까지 시려 잠이 들지 못하는 그런 밤이 찾아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토끼를 걱정하게 됩니다 너무 추운 것은 아닐까 토끼는 무사한 것일까 슬그머니 창밖을 내다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야기─겨울밤 토끼 걱정」 중

 

 

유희경의 『겨울밤 토끼 걱정』은 시마다 '이야기'라는 하나의 제목으로 통일하고 부제로 각각의 이야기에 설명을 덧붙인다. 기억, 상실, 그리움의 테마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각각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시집이 출간된 현대문학 PIN 시리즈는, 특이하게 시집에 해설이 아닌 시론에 가까운 시인의 에세이를 함께 담았다.

 

나의 이야기를 소진하고 있다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 죽음에 이를 것이라 말하는 유희경. 그의 유려한 언어로 이불 속에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듯 생경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

 

 


3. 안희연,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거기 누구 없어요?
산지기는 오래전 이 산에서 길을 잃었다
위에서 긴 나뭇가지가 내려왔는데
끝없이 오르고 오른 기억밖에는 없는데
천사들이 굴렁쇠처럼 시간을 굴리며 놀고
패를 뒤섞는 장난이 있고

이 모든 풍경을 메마름이라고 발음하는 입술이 있다
울다 잠든 밤이 많은 사람

그는 매일 횃불 묶은 마차를 산속으로 출발시킨다

 

「내가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중

 

 

올해 8월 시집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안희연의 『당근밭 걷기』.

 

안희연은 여름의 대명사로 유명한 시인이기도 하지만, 이 시집에서는 죽음과 시간에 감춰진 비의에 대해 말한다. 그의 시 속 목소리는 발랄하고 견고하지만, 그 견고함 뒤에는 수많은 세상의 슬픔이 일렁인다. 그 슬픔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시인이기에 그의 시가 이런 따스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의 문을 열어보는 쪽으로 나의 시가 움직였으면 좋겠다. 아직 열지 못한 수많은 단어들의 문도 언젠가는 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두고 온 것이 많다는 건 시간에 빚진 마음이 많다는 뜻. 빚진 마음은 반드시 문장이 되게 되어 있다.

 

에세이 「빚진 마음의 문장-성남 은행동」 중

 

 

빚진 마음으로 시를 쓴다는 그의 언어를 함께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4. 사이토 마리코, 『단 하나의 눈송이』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나이를 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잊은 채로 당신의 나라에 와버렸고
잊은 채로 당신의 학교에까지 와버렸습니다
팔짱을 끼고 독수리상을 지나서 좀 왼쪽으로 올라가면
당신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당신의 나이를 넘은 제 삶을

여기에 옮긴 것은 옳았던 것인지

「비 오는 날의 인사」 중

 
 
마지막으로 한국어로 시를 쓰는 사이토 마리코의 시집, 『단 하나의 눈송이』 를 소개하겠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윤동주의 시에 매료되어 한국어와 한국 시를 공부하여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는 '눈송이'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타국의 이가 천천히 굴려보는 한국어의 섬세한 어감, 그를 시로 직조해내는 잔잔한 시선을 고요 속에서 함께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

 

여기까지 눈 오는 날 읽기 좋은 네 권의 시집을 소개해보았다.

 

날씨와 계절감을 맞춰 옷을 입듯, 오늘의 온도에 어울리는 차갑지만 따스한 시집을 한 권 품어보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동안, 어떤 문장은 남을 것이며, 계속해 당신의 마음 속에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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