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이번 설은 쿨하게 패스해 버렸다. 이틀간의 폭설로 도로가 얼어붙어 이동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괜히 출발했다가 눈길에서 오도 가도 못할까봐 제사는 큰집 식구들끼만 지내는 걸로 합의를 봤다. 조상님도 이번 만큼은 양해해 주시리라 믿으며. 최초로 생략한 명절 앞에서 이 앙큼한 손녀는 사실 속으로 잘 된 일이라며 좋아했다. 잔소리가 없어서 기뻤으니까. 우리 집안은 사촌 오빠 밑으로 결혼이 멈춘 상태인데, 서열상 가야 될 순번에 처한 나는 명절이 달갑지 않다. “너 올해 나이가 몇이냐, 만나는 사람은 있냐, 왜 없냐, 시집은 언제 가냐, 땡땡이는 이번에 애를 낳았다더라”와 같은 결혼 압박에 허허 웃는 것으로 방어를 하다 1차로 기가 빨리고, 어느덧 세뱃돈 열외 대상자가 되어 조카들에게 세뱃돈으로 얼마를 줘야할지 고민하느라 2차로 기가 빨릴 것이 분명했다. 생각만으로도 진이 빠졌지만 잔소리를 면해 다행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북적거리는 기분은 내고 싶었다. 주먹보다 더 큰 레드향 하나를 챙겨 전기장판에 드러누운 후 ‘아유 꼴보기 싫어 꼴보기 싫은데 토크를 잘해’라고 적힌, 대충 봐도 시끄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썸네일을 터치했다. 몇 번의 터치로 어렵지 않게 이맘때쯤의 명절 식구를 소환할 수 있었다. 그렇다. 때맞춰 안방으로 달려와 준 이들은 바로 <핑계고>의 유재석과 그의 동생들 이동욱, 조세호, 남창희이다. 나는 한 사람의 계원(핑계고 구독자 애칭)으로서 이들과 벌써 세 번째 설 연휴를 맞이하는데 볼 때마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신기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들만의 케미가 흡사 버르장머리를 단속하는 큰아버지와, 심드렁한 막내삼촌과, 말은 많지만 말은 잘 듣는 조카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버릇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줄 알고 뭐라 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윗옷에 손이 감춰진 것뿐이었던 유느님과 욱동의 주머니 해프닝은 이번 에피소드에서 단연 명장면이었다. 민망해하는 유재석에게 “주머니에 손 넣었게 안 넣었게?” 자꾸 놀리는 이동욱의 활약에 물개박수를 쳤더랬다. 그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을 때는 진짜 설 명절 분위기가 물씬 났다. 만사가 귀찮은 어느 집안의 삼촌을 보는 것만 같아서. 그 옆에서 애착 동생인 호세와 희창은 형들이 대충 듣고 있어도 하고 싶은 말을 꿋꿋하게 이어나간다. 계란 지단은 또 어찌나 열심히 써는지. 함께 먹을 떡국도 척척 끓여 낸다. 마치 집안 어른을 잘 모시는 훈훈한 조카들 같아서 웃음이 났다. 그렇게 남자 넷이 깨알 같이 수다를 떨고 떡국 먹는 풍경을 지켜보는 것으로 설을 퉁쳤다.
돌고 돌아 무해한 것으로
영상의 길이는 무려 1시간 10분. 긴 토크 영상을 스킵하지 않고 전부 다 봤다. 그 어떤 부대낌도 없이 말이다. 뜬금없지만 슬픈 고백을 하자면 나는 이제 보고 싶은 것을 원하는 대로 다 볼 수 있는 체력이 안 된다. 삼십대 중반이 되니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전처럼 팔팔한 에너지로 도파민 터지는 수많은 영상물을 욕심껏 소화시킬 수 없단 얘기다. 보는 일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이제 도파민에 무한히 절여지는 건 버겁다. 자극적인 소재에서 느끼는 피로감도 부쩍 늘었다. 어쩌면 무해한 쪽으로 자꾸 마음이 기우는 건 일종의 생존본능(?)일지도 모르겠다.
편한데 웃기기까지 한다? 그거야말로 진짜로 어려운 일이다. 억지도 없어야 되지, 과하지도 않아야 되지, 재미까지 있어야 되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니까. 그런데 그 높은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는 예능이 나타났다는 거다. 바로 유튜브 채널 뜬뜬의 토크 콘텐츠 <핑계고>. 긴 시간 동안 수다를 떠는 과감한 포맷에 놀랐고, 자극적인 것 없이 토크만으로 충분히 웃겨서 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런 종류의 재미가 가능하다는 것도 핑계고를 통해 알게 되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게 눈에 보였다. 특히 첫 설 연휴 토크였던 6화 영상의 조회수는 무려 1394만회로 채널 영상 통틀어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실로 어마어마한 관심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웃음이 함께한 걸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웃음에 기댔을까. 무해함에 기댄다는 건 우리가 지금 많이 지치고 힘들어서, 은연중 마음을 다쳐서이지 않을까 반대편에서 헤아려 본다.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인해 모두 상심이 크다. 불안정한 사회에서 알 수 없는 무기력함과 상실감을 느끼며 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기대마저 조심스럽다. 희망을 쉽게 장담할 수 없어 씁쓸하기도 하다. 말은 안 하지만 다들 속으로는 마음 다독여 줄 어떠한 존재를 찾으며 이 시기를 조용히 극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순함으로 가득한 설 토크가 꽤 괜찮은 마음 둘 곳이 되어줄 수 있겠다. 웃음과 재미만이 전부가 아닌 예능의 또 다른 본질을 발견한 기분이다. 이 무해한 기운이 부디 무탈함으로 번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김없이 찾아온 새해 앞에 우리 모두 마음 덜 다치길, 조금은 더 웃을 수 있길.